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몽찰] 리퀘 - 피어나는 꽃의 이야기 (下)

블랙팬서 / 몽찰 / 피스틸버스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 * *

 

  [반응 어때? 완전 감쪽같다고 하지 않아? 은자다카도 비브라늄을 이렇게까지 쓸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을걸?]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슈리가 장난스런 웃음을 만면에 걸고는 강아지처럼 들떠 이야기를 쏟아냈다. 일이 어찌되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트찰라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와칸다를 떠나오던 며칠 전까지만 해도, 트찰라는 ‘계획’의 결과를 슈리에게 웃으며 얘기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뭐? 지금 그거 슈리야?’ 하고 은자다카가 옆자리에 달려와 앉아서는, ‘역시 너였냐, 그따위 걸 만든 게?’ 하고 성토하는 모습도 조금은 짓궂게 상상했었고.

  그런데.

  “그게 말이야, 슈리……”

  [안 속았어? 그럴 리가 없는데? 두께가 육안으로는 확인이 안 된단 말이야. 등에 완전히 밀착시켰는걸. 겉으로 봐선 질감도 완벽해.]

  “……너무 완벽히 속인 것 같아서 고민이야.”

  [응?]

  “아직 말을 못했어. 이게 가짜 꽃이고, 얇은 스티커처럼 붙인 거라고는…….”

  [……뭐야, 그럼 아직도 그게 진짜 꽃인줄 알고 있다고? 계획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거네?]

  “그래…… 처음부터 잘못 계산했던 것 같아.”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트찰라의 표정이 침침했다. 그의 원래 계획은 이랬다.

  첫째, 슈리가 지난달에 완성한 밀착형 비브라늄 텍스처로 가짜 꽃을 만들어 등에 붙이고 은자다카의 앞에서 자연스레 등을 보여준다. 마치 피스틸의 꽃이 핀 것처럼. 둘째, 은자다카가 등이 왜 그렇냐고 당황해서 물으면 곧바로 가짜 꽃 위에 키모요 비즈를 갖다댄다. 비즈에 반응한 가짜 꽃은 등에서 떨어질 테고, 트찰라는 은자다카가 보는 앞에서 꽃을 들어 보여준다.

  계획을 짰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원-투 스텝의 간단한 플랜이었다. 하지만 은자다카는 분명 트찰라의 등을 보았음에도 보지 못한 척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때서야 트찰라는 제가 세운 계획의 맹점을 깨닫고 당황했다. 등이 왜 그렇느냐는 은자다카의 질문이 없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대화의 핵심 화제가 회피될 수도 있다는 변수를 생각지 못했던 저의 패착이었다.

  덕분에 트찰라는 은자다카가 보는 앞에서 꽃을 떼어내 보여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가짜 꽃을 보여주면서 했어야 했던 중요한 말이 있었는데 그것도 하지 못했다.

  ‘원래는 이렇게 쓰려고 만든 것이 아니지만, 등에 붙일 수 있게 꽃 모양도 만들어 달라고 내가 부탁했어.’

  트찰라는 그렇게 말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계획 자체가 그 말을 은자다카에게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기도 했다. 일부러 가짜 꽃을 붙여 너를 속였노라고. 바로 그렇게 말할 순간을 얻기 위해서. 그러면 은자다카는 물어올 터였다.

  왜?

  왜 굳이 가짜 꽃을 만들어 그를 속였는가. 그 질문에 뭐라고 답할지 트찰라는 사실 완전히 결정하진 못한 상태였다. 선택지는 몇 가지가 있었다.

  ‘너를 떠보고 싶었어. 내게 연인이 생겨도 너는 아무렇지 않을 것인지.’

  혹은,

  ‘눈썰미 예리한 네가 속으면 다들 속을 테니까. 테스트 협조 고마워.’

  라든가.

  좀 비겁한 방식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정직하게 제 마음부터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은자다카가 저에게 마음이 있는지를 먼저 떠보는 시도였으니까. 하지만 트찰라는 상황이 여의찮다면 마음을 숨기고 장난스럽게 넘겨버릴 여지를 남기고 싶었다. 최근엔 와칸다에 휴가를 보내러 오는 것도 관심 없고, 연락을 주고받을 때도 어쩐지 시큰둥히 열의가 없는 은자다카다. 특히 이번에 트찰라가 직접 미국에 가겠다고 했을 때에는 좀 떨떠름하기까지 한 기색이었다.

  그런 은자다카에게,

  ‘너를 좋아해, 은자다카.’

  직설적으로 고백한다면? 글쎄. 사촌에게 아무 감정이 없는 은자다카라면 트찰라의 고백은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경험이 될 터, 트찰라는 고백 이후의 끔칙한 침묵과 어색한 분위기를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지금도 조금씩 서먹하게 멀어져가는 은자다카인데, 고백 때문에 저와의 끈이 완전히 끊어져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는 끝내고 싶지 않았다. 다시 얼굴을 보기 곤란한 사이가 되는 것보다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 지금 같은 사촌관계가 차라리 나았다.

  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어왔다.

  [등에 꽃이 있는 걸 보기는 본 거지?]

  “그래.”

  [그런데 아예 못 본 척 했다고?]

  “당황한 것 같긴 했어. 그렇지만 등 얘기는 안 하고, 그냥 덥냐고만 묻던걸.”

  꽃을 직접 화제에 올리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애인이 생겼느냐고는 물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조차도 않을 줄은. 덕분에 트찰라는 의기소침해졌다. 은자다카가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은연중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등의 꽃에 관해 질문하는 은자다카를 당연스레 상정한 것도, 물어보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까닭임을 트찰라는 새삼 깨달았다.

  이건 오만함의 대가일까. 은자다카의 마음이 제게 향해 있을 거라고 감히 자신했던.

  [흠…… 그 텍스처 지금도 등에 붙어있지? 등 좀 보여줄래?]

  잠깐 생각에 잠겼던 슈리가 말했다. 트찰라는 군말 없이 돌아서서 티셔츠를 벗었다. 그의 맨 등이 비즈를 통해 슈리의 화면으로 전송되었고, 다음 순간, [이게 뭐야!] 라는 외침과 함께 [푸하하하하하하하!] 폭소가 통신 비즈에서 터져나왔다. 당황해서 돌아본 트찰라의 눈에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린 슈리의 모습이 비쳤다.

  [오빠 등에, 지금 패턴 3번이야… 꽃 세 종류 말야, 꽃이 세 개! 으히히히히힉! 저게 뭐야!]

  “세 개? 하나가 아니고……?”

  [으힉! 뭐 건드렸어? 왜 3번이래? 은자다카 완전 당황했겠는데, 으하하하하학! 와하하하하학!]

  “……목욕할 때…… 비즈를 건드렸던 것도 같고……”

  트찰라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패턴 3번이면 기억이 났다. 슈리가 만든 텍스처는 여러 패턴을 동시 저장해 두고 사용할 수 있었다. 트찰라의 등에 사용할 목적으로 저장되었던 패턴은 총 3개. 그중 3번은 꽃이 배치된 모양새가 예쁘긴 한데 꽃 종류가 3개인 건 과하단 생각으로 꽃이 1개뿐인 패턴 1번으로 결정했었다.

  한참을 웃다가 아예 눈물을 쏙 뺀 슈리가 파닥파닥 손부채를 부칠 때까지, 트찰라는 은자다카의 오해를 상상했다. 그저 발밑이 아득했다. 슈리가 눈물을 닦아내며 키득거렸다.

  [오작동 가능성도 있으니까 검사해볼게. 근데 나라도 모른 척했겠네. 오빠 등에 꽃이 세 종류면 말도 못 꺼내지. 오빠, 감사해야겠다. 프라이버시를 존중할 줄 아는 좋은 사촌을 뒀잖아.]

  “그만해라……?”

  [네네. 그럼…… 이제 어쩔 거야, 오빠?]

  트찰라는 화끈거리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서 대꾸했다.

  “……내일 바로 말할거야. 가짜 꽃이라고.”

  [뭐, 그래도 상관은 없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일을 쳐 보는 건 어때?]

  “일을 더 친다고?”

  [응. 밤에 괜히 늦게 들어오고 외박도 해보고. 가까운 클럽 어디 있는지도 물어보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잔뜩 아주 자안뜨으윽 있는 티를 무럭무럭 내서…… 이왕 질투 작전을 시작했으면 좀 더 해보지? 꽃을 세 개나 붙이는 건 의도가 아니었지만, 이런 기회가 오기도 쉽지 않잖아?]

  “질투 작전……”

  미간을 좁힌 트찰라가 역시 그럴 수는 없겠다고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슈리가 말을 이었다.

  [오빠 성격이라면 내일 분명히 아침밥 먹다 말고 ‘내 등에 있는 꽃은 사실 가짜고 새 발명품을 테스트하는 중이야’ 어쩌고 대뜸 은자다카한테 얘기해버릴 거란 말이지. 고백 타이밍을 완전히 망치는 30가지 방법 같은 게 있다면 가장 첫번째에 꼽힐 그런 걸로. 근데 고작 그렇게 끝내려고 나한테 텍스처 개량을 부탁하고, 등에 붙여서 은자다카에게 보여준 거야? 미국까지 갈 때의 오빠는 뭘 원했던 거야? 뭘 어쩌고 싶은데?]

  슈리의 마지막 질문이 예상치 못한 울림으로 트찰라에게 부딪쳐 왔다.

  내가 원했던 것. 나는……. 뭘 어쩌고 싶으냐고.

  통신을 끝낸 트찰라는 깊어가는 밤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환한 실내의 불빛이 유리창에 담기고, 거울처럼 비치는 제 모습 때문에 바깥은 잘 보이지 않았다. 트찰라는 창에 좀더 다가서서, 밤공기로 싸늘해진 유리에 이마를 갖다대었다. 이렇게 다가서야만 들여다 보이는 것들을 보기 위하여.

  넌 뭘 어쩌고 싶으니, 트찰라. 뭘 원해서 여기까지-은자다카의 곁에 왔지?

  그는 말없이 질문에 잠겨들었다.

 

* * *

 

  시발, 난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걸까.

  침대에 누워 눈두덩에 팔을 얹은 채로 에릭은 중얼거렸다. 모닝콜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깬 그의 기분은 최악을 달렸다. 꿈자리가 엉망이었다. 트찰라가 나왔으니 좋은 꿈을 꾸었다고 해야겠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다. 트찰라와 섹스하는 꿈이었기 때문에. 아니 섹스를 했다는 것은 희망사항이 반영된 표현이고, 마음대로 범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고는 에릭은 몸을 일으켜 헤드에 기대앉았다.

  “하, 시발, 하필 꿈도 그런 걸…….”

  트찰라의 다리를 벌리고 그의 안으로 밀고 들어간 장면이 생생했다. 잡아 내리누르는 것으로 시작한 관계였으나 꿈 속의 트찰라는 팔을 뻗어 제 목을 감아왔다. 마치 환영하듯, 트찰라 역시도 이 순간을 간절히 원해왔다는 듯이. 도리어 에릭을 유혹하면서. 꿈 속의 에릭은 제게 감겨오는 트찰라의 팔에 만족하고 희열했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너도 나를.

  그 다음부터는 정신없이 제 사촌을 범했다. 쳐올리는 허릿짓 한번 한번에 자지러지는 트찰라의 신음이 야하고 요란했다. 품으면서 내려다본 트찰라의 등은 꽃 한송이도 없는 말끔한 상태였고, 에릭은 거기에 제 꽃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놈들이 감히 트찰라를 기웃거릴 수 없도록, 제 꽃을 새겨야겠다고. 그러자 마치 생각이 씨를 뿌린 것처럼 꽃이 피어났다.

  에릭은 트찰라의 안에 저를 묻은 채로 트찰라의 등에 피어나는 꽃을 보았다. 아름다운 옅은 색의 나뭇가지 사이로 피어나는 꽃은 저의 오래 앓아온 뱃속처럼 새카만 색깔이었다. 누구의 등에도 한번 피워본 적 없는 꽃이었으나 그 꽃의 속성을 에릭은 알고 있었다.

  베놈. 사랑보다 지독한 독.

  ‘꽃을 남기겠다고.’

  에릭은 자괴감에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래, 시발, 너도 스테먼이라 이거지. 에릭 스티븐스……’

  그는 제 꿈을 곱씹었다. 투영된 욕망의 대목들이 지나치게 선명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강제로 시작해도 거리낌없이 저를 받아들이는 트찰라와, 세 송이의 꽃이 말끔히 사라진 그의 등. 거기에 남긴 유일한 꽃인 저의 꽃. 자신이 뭘 어쩌고 싶은지는 이쯤엔 훤히 들여다보일 지경이다. 무엇보다도 명백한 강간이었던 시작을 트찰라의 유혹으로 바꾸어 꿈의 상황을 변질시킨 자신이 치가 떨렸다. 에릭을 유혹해오는 트찰라. 그건 이미 청소년기부터 에릭의 숱한 밤을 적셨던 몽정의 익숙한 레퍼토리였다.

  내 욕망이잖아. 그걸 트찰라에게 덮어씌우지 마. 제멋대로 트찰라의 얼굴을 입히지 말라고.

  에릭은 저 자신에게 엄중히 경고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제 안에서 침을 뚝뚝 흘리는 짐승에게 단단한 입마개를 씌우고, 목줄을 바싹 잡아맨 다음,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할 것이다. 안 된다고. 꿈도 꾸지 말라고. 트찰라는 와칸다의 왕이 될 것이고, 왕비를 맞이할 것이며, 후계자를 얻어 다음 대의 왕에게로 왕좌를 대물림할 것이다. 그러니 트찰라가 가야 할 길에 끼어들 생각 따위 하지마. 내 욕망을 트찰라의 욕망인 것처럼 채색해서 자꾸만 머리를 들이밀지 말라고.

  그럼에도 트찰라의 등을 생각하면 울컥 분노를 닮은 감정이 치솟는다.

  ‘왜 나는 안 되는데?’

  이렇게 되기 전에 고백했으면 좋았잖아. 내 걸로 만들어 버렸으면 좋았잖아. 내 꽃을 새겼으면. 베놈의 독을 트찰라의 등에 잘 보이도록 심었으면 아무도 감히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텐데. 목숨을 내놓고 덤벼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그렇게까지 생각해버리는 자신에게 신물이 난다. 감정과 욕망은 대체 어디서 시작하는 것일까. 그것들이 깃든 곳이 어디건, 잘라버림으로써 끊어낼 수 있다면 팔 한짝이든 다리 한짝이든 기꺼이 버릴 텐데.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설득되지 않는 충동과 욕망은 단순히 체념을 모르는 짐승의 으르렁거림일 뿐일까. 아니면 스테먼의 형질이 농간을 부리는 것일까. 이대로라면 어느날엔가 자신은 갑자기 트찰라의 팔을 붙잡고 말해버릴지도 모른다.

  ‘나, 너 좋아해. 다른 놈들에게 너를 주지 마.’

  라고, 맥락도 이성도 관계없이. 그저 충동이 시키는 대로.

  황당하겠지, 트찰라는. 황당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트찰라도 조금은 예상하지 않았을까? 트찰라도 저에게 마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무방비하게 등을 보여주겠는가. 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은근슬쩍 떠보려던 게 아니었을까……

  ‘아, 시발.’

  에릭은 머리를 털었다. 방금까지 스스로에게 경고한 걸 다 까먹은 멍청한 머리가 또 자신의 욕망을 트찰라에게 덮어씌우고 있었다. 쳇바퀴를 구르듯 계속 제자리를 맴돈다.

  역시 미국에 오겠다고 할 때 좀더 강력하게 만류했어야 했는데. 네가 와도 나는 너랑 어울려줄 시간이 없으니까, 혼자 미국 관광을 하고 돌아가는 꼴이 되어도 상관없으면 오든가. 그렇게 으름장을 놓아서라도 오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

  닷새 전 어영부영했던 자신을 후회하며, 에릭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새벽 5시. 활동을 시작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다시 잠을 청한다고 누워 있어봤자 침대에서 뒤척거리기만 할 터. 대충 바지를 걸쳐 입은 그는 길게 하품을 흘리며 방을 나왔다. 커피라도 한 잔 내려 마실 생각이었다. 거실의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는 트찰라를 목격하기 전까지는.

  ‘저 녀석은 또 왜 여기 있어? 이 시간에?’

  당황스러운 나머지 조용히 방으로 되돌아갈까 따위의 한심한 생각마저 떠오른다. 트찰라가 흘끗 고개를 돌려 에릭 쪽을 쳐다보지만 않았어도 정말 그랬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미 밖으로 나온 모습을 보인 이상, 확연히 부자연스러운 꼴로 도망치듯 돌아서고 싶지는 않았다.

  에릭은 최대한의 평정을 가장하며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새벽 5시에 거실에 침침하게 앉아있는 사촌을 보고서도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것 역시도 꽤나 어색한 꼴이라는 사실을, 원두를 꺼내 그라인더에 담았을 때에서야 에릭은 생각해낼 수 있었다.

  “안 잤어? 너도 커피 줄까?”

  그라인더의 뚜껑을 꽉 눌러 스위치를 넣으면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거실 쪽으로 소리쳐 물었다. 이미 갈기 시작한 원두나 끓이는 물은 2잔이 충분히 나올 양이었지만, 새삼 꺼낼 말은 그 정도 뿐이었다. 잠깐의 텀을 두고 대답이 돌아왔다.

  “……응. 고마워.”

  “잠 깰 거면 좀 진하게 내릴까?”

  대답 대신 타박타박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사촌이 부엌에 모습을 드러냈다. 트찰라는 에릭이 커피를 갈고 있는 아일랜드 식탁까지 걸어와 말했다.

  “그냥. 평소처럼 해주면.”

  와칸다에서 몇 번 내려주었던 맛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제 곁으로 가까워지는 트찰라 때문에 심장이 조금 떨렸다.

  “얼음은?”

  “얼음은 없어도 괜찮은데… 넣는 게 나아?”

  “원두에 산미가 좀. 난 얼음 넣어 마실 거긴 한데. 없어도 나쁘진 않아.”

  “그럼 나도 얼음.”

  “알았어.”

  불빛에 드러난 트찰라의 얼굴을 에릭은 흘끗 훔쳐보았다. 눈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눈이 부은 것 같지도 않고. 혼자 울고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대체 새벽 5시에 무슨 심란한 일이 있어 거실 소파에 혼자 오도카니 앉아있었을까. 에릭은 흘끔거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드립퍼에 여과지를 깔고는 파쇄한 원두를 담았다. 한소끔 끓어오른 물을 포트에 옮겨 담고, 긴 곡선형의 주둥이로 흘러나오는 물을 천천히 소용돌이를 그리듯 부었다. 서버에 커피가 충분히 내려졌다 싶을 때 에릭은 얼음을 꺼내 컵에 나눠 담았다. 그 위로 커피를 부어 트찰라에게 내밀었더니 컵을 받아든 트찰라가 향을 가만히 들이키다가 한 모금 천천히 입에 담았다.

  “여전히 맛있네.”

  “누구 솜씬데 당연한 소릴.”

  뻔뻔히 받아치는 소리에 슬그머니 웃는 옆모습이 이렇게 예쁠 일일까. 이미 알고 있지만 나도 참 답이 없다, 뇌까리며 에릭은 이제 어쩔까를 고민했다. 커피를 내렸으니 방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잠은 좀 잤어?”

  의자를 빼 앉으며 물었더니 트찰라가 거실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자긴 잤어. 생각을 좀 하느라.”

  “……뭔 일 있냐?”

  트찰라의 등에 피어있던 꽃이 머릿속을 스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최대한 내색 않으려 애쓰며 물었더니 트찰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나는 뭘 어쩌고 싶은 걸까…… 그런 걸 생각했지.”

  꿈 때문에 심란해졌던 에릭의 머릿속을 찌르는 한 마디였다. 침대에 멀뚱히 앉아 저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에릭은 “그러냐……” 대충 대꾸하며 호르륵 커피 한모금을 들이켰다. 제 표정이 어떤 꼴일지 알 수 없으니 컵에 가려지기를 기대하면서. 트찰라는 그런 에릭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컵에 시선을 붙여둔 채로 말을 이었다.

  “그런 때가 있잖아. 삶이 속수무책으로 흘러간다고 느낄 때. 이걸 멈춰 세우고, 내가 원하던 방향이 맞는지를 고민하고 싶을 때. 이대로라면 점점 더 가고 싶던 곳과는 멀어지기만 할 것 같을 때. 나는 그랬던 것 같아. 그래서 좀 생각을 했는데…… 흐름에 몸을 맡긴 채로 이게 내가 가고 싶던 방향이 맞는지 고민만 할 게 아니라, 직접 가고 싶은 쪽으로 움직이는 게 옳지 않느냐고,”

  거기까지 말한 트찰라가 눈을 들어 에릭을 쳐다보았다.

  “그런 생각을 했어.”

  “…….”

  “은자다카. 어제 봤겠지만 내 등에 있는 꽃 말이야,”

  쿨럭! 들이키던 커피를 에릭은 거하게 뿜어버렸다. 이렇게 훅 들어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터였다. 트찰라의 말이 어쩐지 저에게도 깊이 닿아 와서 좀 감상적인 기분이 되고 말았는데, 화제가 어제 보았던 그 꽃으로 이렇게 튈 줄은.

  쿨럭거리며 티슈를 찾아 뽑은 에릭은 제 입과 테이블 위를 급하게 훔쳤다. 대충 정리를 하고는 “어, 그래. 어.” 하고 계속하라는 뜻으로 손을 휘저었다.

  “……을 완전히 망치는 30가지 방법…….”

  트찰라가 뭐라 침울하게 중얼거리는 것 같아서 “응?” 하고 물었더니 “아니야.” 하고 고개를 젓는다. 곧 눈을 질끈 감는가 싶더니, 트찰라는 커피를 벌컥벌컥 바닥까지 들이키고는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결투 신청처럼 결연히 말했다.

  “그거 가짜야.”

  “……응?”

  “가짜라고. 너 떠보려고 붙여서 일부러 보여준 거야.”

  “……응?”

  에릭은 얼떨떨하니 되물었다. 분명히 커피를 마셨는데. 아직 꿈을 꾸는 중일까. 어? 어? 하는 물음표만 반복해서 떠오르는 머릿속에 트찰라가 방금 한 말이 잘 수납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짜라고? 뭐가? 꽃이? ……트찰라의 등에 피어 있던 그 꽃?

  “보여줄까?”

  “아니, 아니, 괜찮아…… 그렇게까지는……”

  손을 내저으며 사양하자 트찰라가 안색을 굳혔다.

  “왜 널 속였는지 물어봐. 얼른. 물어보라고!”

  “왜, 왜 그랬는데?”

  거의 떠밀리듯 에릭은 질문하고 말았다. 트찰라는 숨을 훅 들이키더니 손을 꽉 맞잡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달싹이다 대답했다.

  “……네가 좋아서. 너도 날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서.”

  아. 이건 꿈이다. 망할 꿈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꿈을 꾸는 동안에는 이게 꿈인줄 알아채지를 못하잖아. 그러니까 속지 말자. 에릭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쩐지 정말로 꿈이 아닌 것 같았다. 에릭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황망히 트찰라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트찰라가 입술을 꾹 물었다.

  “너를 좋아해…… 은자다카.”

  그렇게 말하는 트찰라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모여들었다. 헉, 당황해 숨을 삼키는 에릭이 어쩌지도 못하는 사이 눈물이 한방울 툭 떨어졌다.

  “나는 너도 날 좋아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봐. 아니었다면 미안해.”

  그렇게만 말하고 자리를 뜨려는 트찰라를, 에릭은 저도 모르게 붙잡았다.

  “나도. 그러니까.

  간신히 입술을 달싹여 말했다. 제가 상상해 보았던 고백의 순간 중에서 이렇게 황당하고 어이없이,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제 속내를 털어내는 순간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찰라. 나도.”

  뒷말은 잇지 못했다. 덜덜 떨리는 입술. 트찰라를 붙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 그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트찰라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눈물이 고인 눈을 깜빡이며 에릭을 바라보던 트찰라가 안도한 듯 웃었다. 잔뜩 세운 어깨가 허물어지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 * *

 

  “근데 나 베놈인데.”

  “베놈? 아. 스테먼 중에 베놈? 독이 있다는?”

  “응. 그거.”

  이 이야기를 태연히 트찰라에게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트찰라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에릭은 품을 가득 채우며 안긴 트찰라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잠깐 생각하던 트찰라가 기억을 짚어보는 것처럼 말했다.

  “베놈의 꽃이 한번 피면 다른 사람과는 하면 안 된다던가? 독이 퍼져서 죽으니까.”

  “응.”

  대꾸했더니 시큰둥히 “흠……” 중얼거리는 트찰라는 별반 걱정도 되지 않는 투였다. 간질간질한 뭔가가 가슴에 차오르는 것 같아 트찰라의 목에 한번 입술을 쪽 붙여보고 싶어졌지만, 이래도 되나 하는 망설임은 아직 에릭의 속에 남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고백 첫날에 진도를 너무 빼는 건 좀 그렇지, 생각하며 그는 어깨를 괴었던 고개도 들어올려 허리를 폈다. 그러자 트찰라가 아예 드러눕듯이 가슴에 기대어 왔다. 그 상태로 트찰라는 눈을 들어 에릭과 시선을 맞췄다.

  “은자다카.”

  “응.”

  “그걸 고민했다는 건 내가 기대해도 된다는 뜻이지?”

  “……어?”

  “아니야?”

  “……어, 그래, 응. ……맞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쩔쩔매며 대꾸했더니 트찰라도 덩달아 얼굴에 열기가 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대로 둘 사이의 대화가 멈추자 안절부절 못하는 듯하던 트찰라가 슥 몸을 일으켰다. “……나 물 좀.” 변명하듯 중얼거리며 빠져나가는 트찰라를 에릭은 그대로 놓아주었다. 부엌으로 걸어가는 트찰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에릭은 생각했다. 트찰라가 했던 말을.

  - 흐름에 몸을 맡긴 채로 이게 내가 가고 싶던 방향이 맞는지 고민만 할 게 아니라, 직접 가고 싶은 쪽으로 움직이는 게 옳지 않느냐고.

  그렇구나. 네 말이 맞다. 그리고 네 곁에서라면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항상 명확히 알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 지금은 너와 함께 있는 것을 먼저 생각하면 되겠지.

  아직 트찰라에게 못다 한 얘기는 많았다. 에릭이 와칸다에 정을 떼게 되었던 물밑의 몇 가지 일이라든가, 왕위 계승과 얽힌 부족들 간의 신경전 같은. 아마 트찰라도 완전히 모르지는 않을 일들. 하지만 어쩌면 에릭에게만 보였을지도 모르는 것들. 피어나는 꽃들처럼 그 이야기도 하나씩 트찰라의 앞에서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쯤에는. 네 등에 내 꽃을 피우는 게 과연 좋은 일인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때쯤에는 나도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

  트찰라. 나의 왕.

  그렇게 속삭이며 끌어안는 트찰라의 등에 저의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에릭은 상상해 보며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리퀘박스에 3번째로 주셨던 리퀘입니다.

리퀘를 보고, 피스틸버스를 좀 공부(!)한 다음엔, 아 에릭이 베놈, 트찰라가 피스틸이기만 하면 되나? 나머지 내용은 내가 맘대로? 이렇게 신나서 덤벼들었더니 도리어 좀 헤맨 것 같습니다...(헤헿) 높은 자유도... 높은 확률의 헤맴... 헤헿... 그런 것 같네요.

그래도 써보고 싶었던 것들을 맘껏 썼습니다. 질투하는 은자, 삽질하는 몽찰, 망한 고백... (취향 보소) 

상편에 댓글 달아주신 분들께 대댓글을 달고 싶었지만 이런 하편이 될 거라고 차마 말은 드릴 수 없어서...^_^; 가만히... 아주 가만히 하편으로 넘어왔는데, 어떻게 읽으셨을까요. 주셨던 댓글 정말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오오! (반성 없이 뻔뻔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몽찰하시는 분들 항상 사랑합니다!>_<


소으름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