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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찰] 리퀘 - 피어나는 꽃의 이야기 (上)

블랙팬서 / 몽찰 / 피스틸버스

*리퀘로 받은 피스틸버스 AU. 피스틸버스 설정을 모르시는 분도 읽는 데는 문제가 없도록 쓰고 있습니다. (아마도요.)




피어나는 꽃의 이야기

wirtten by 소으름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의 먼 시초를 꼽자면, 역시,

  ‘바바, 트찰라는 왜 등에 나무가 그려져 있어? 왕자라서 그런 거야? 아니면 어디 다친 거야?’

  천진하게 아버지 은조부에게 물었던 10살의 어느 날. 그것일 테다.

  ‘나무?’

  되묻는 바바의 목소리에 서린 미묘한 당혹감을, 당시의 에릭은 읽지 못했다. 설핏 안색을 굳힌 은조부의 기색에 주의를 기울이기에는 에릭은 그날 제가 본 것에 도취되어 있었다.

  ‘응, 나무. 막, 나뭇가지 같은 게 등에 잔뜩. 되게 예뻤는데.’

  부족한 어휘 중에서 골라낼 수 있었던 것이 고작 ‘되게 예뻤다’는 말뿐. 말해놓고도 에릭은 어린 마음에 인상을 썼다. 마치 겨울 나뭇가지의 형상, 피부색보다 조금 옅은 빛깔로 굽이굽이 뻗어 있던 선들. 누가 일부러 그려 넣었다기보다는 스스로 뻗어간 것처럼 보이는……. 트찰라의 등에 있던 그것을 묘사하기에 ‘되게 예뻤다’는 말은 어린 제가 느끼기에도 한참 모자랐다. 그러니까 좀더…… 굉장한? 환상적인? 존나 멋진? 하여간 그런 수식어들을 덕지덕지 붙여야 할 것 같았다.

  에릭은 제 표현을 정정하고자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적확한 단어를 찾아 끙끙거렸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10살, 은조부가 ‘그건 어쩌다 봤니? 트찰라의 등에 그려져 있다는 그 나뭇가지 말이다.’ 하고 질문해오자, 붙잡았던 고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저의 와칸다 체험담을 신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번에 바바를 따라 밟은 와칸다의 땅도 처음, 눈이 휘둥그레지는 풍경과 압도되는 왕궁의 위용도 처음, 그곳에서 제 또래의 사촌을 만난 것도 처음, 모든 처음의 순간들이 에릭에게는 굉장했다. 특히 성격이 순한 트찰라와는 금세 죽이 맞아 의기투합하니 그렇게 하루하루가 즐거울 수가 없었다. 둘만의 탐험처럼 와칸다 곳곳을 돌아다닌 이야기가 들뜬 에릭의 입을 타고 술술 흘러나왔다. 어느 강변에 어떻게 도착하여 신나게 멱을 감았는데, 숫기가 없어 머뭇대는 녀석에게 물을 끼얹고 장난을 쳤더니 트찰라도 저처럼 홀딱 벗고 물에 뛰어들더라 - 하는 이야기까지 털어놓자, 은조부가 한 번 더 상황을 짚었다.

  ‘둘만 있을 때 보았다는 거구나. 다른 사람에게는 말한 적 없고?’

  에릭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랬다. 옷을 벗고 물에 뛰어든 트찰라의 등에 가득 새겨진 나뭇가지의 형상을 본 순간, 그 기이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으면서도 에릭은 그것이 큰 사고의 흔적일까봐 트찰라 본인에겐 차마 내력을 묻지 못했다. 사람이 번개를 맞고 살아남으면 몸에 저 비슷한 흉터가 생긴다는 걸 어디서 읽은 기억도 났다. 설마 그런 종류의 일일까. 많이 아팠을까. 아니면 와칸다의 왕자한테는 그런 게 원래 있는 걸까. 새록새록 피어나는 궁금증을 삭일 수 없었던 탓에 저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사람으로서 가장 신뢰하는 바바 - 은조부에게만 슬쩍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하지만 바바는 트찰라의 등을 채운 나뭇가지 무늬를 설명해주는 대신 엄하게 일렀다.

  ‘은자다카. 그건 못 본 체 해야 한다. 왜 그런지는 다음에 얘기해주마. 그때까지 네가 그런 걸 봤다고 남한테 이야기해서는 안 돼.’

  바바가 굳이 ‘은자다카’라는 와칸다식 이름을 또박또박 힘주어 부른다. 평소엔 저를 ‘에릭’이라 편히 부르는 바바가 말이다. 드물게 이럴 때가 있었다. 극도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을 때, 혹은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말할 때. 그럴 때 바바는 저를 ‘은자다카’라고, 딱딱한 어조에 마디마디 힘을 실어 불렀다. 에릭은 조금 풀이 죽었다.

  내가 트찰라에게 뭔가 잘못했어, 바바?

  이거 트찰라한테 안 좋은 일이야?

  등의 나뭇가지를 봐 버려서?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에릭은 질문을 죄다 삼켜버렸다. 아버지의 굳은 표정은 호기심조차 허락하지 않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에 아버지로부터 그 일에 관한 이야기를 더 들을 기회는 없었으나, 에릭은 트찰라의 등에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결국은 알게 되었다. 진학한 하이스쿨에서, 클래스메이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는 바람에.

  등에 나타난 나뭇가지의 문양.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건 소위 피스틸이라 하는 형질의 발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 트찰라의 등에 그게 설마 그거야?’ 멍하니 생각하는 에릭의 앞에서, 클래스메이트들은 피스틸과 그 반대되는 형질 - 그건 또 스테먼이라고 했다 - 을 안주처럼 들먹이며, 낄낄대는 음담패설을 섞어 온갖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때문에 에릭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그 형질의 사람끼리 육체관계를 맺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 피스틸의 등에 꽃이 핀대. 스테먼이 안에 씨를 뿌리면 피스틸이 받아서 피우는 거지. 콘돔 없이 자면 그렇게 된다는 거야.

  듣지 않으려 해도 생생히 귀를 파고드는 클래스메이트의 목소리들 때문에, 에릭은 누군가의 등에 그려진 나뭇가지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여태껏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제가 트찰라의 등에 관한 이야기를 경솔히 꺼내었다면 어떤 오해가 발생했을지 모른다는 사실 역시도. 여염의 경우에라면 물장난을 치다가 사촌이 타고난 특수한 형질을 어쩌다 알게 된 것이 무에 그리 긴장할 일이겠느냐마는, 그들은 왕족이었다. 왕위 계승과 얽히고 세간의 입을 타면 그게 무엇이건 상황은 가족사의 영역을 벗어나게 되는.

  그날 아버지가 그렇게 단단히 입단속을 한 이유를, 에릭은 성년을 맞이하면서 머리가 훨씬 굵어졌을 즈음에 훨씬 명확한 그림으로 알게 되었다.

  ‘하여간 시발 그놈의 왕위 계승.’

  아버지는 경계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에릭이 트찰라의 등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고 다니면, 그것이 신비한 형상에 매료된 10살짜리의 순수한 찬탄이 아니라 현 국왕의 후계자에 대한 험담으로 받아들여질까봐. 장차 전사의 폭포에서 트찰라의 왕위 계승에 도전할 권리가 있는 - 바꿔 말하면 실질적인 왕위계승권이 있는 - 에릭이 경쟁자의 흠집거리를 떠들고 다니는 모양새로 비쳐질까봐.

  아마 아버지 본인의 대에 형인 트차카와의 사이에서 경험한 것들도 있어 더욱 촉각을 곤두세웠을 터. 그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렸을 때의 에릭은 몇 가지 일을 겪으면서 와칸다라는 나라에 정이 뚝뚝 떨어지는 중이었다. 사람 간의 문제는 언제나 사람에게서 기인하기 마련, 와칸다는 천사나 엘프들의 땅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 엎치락뒤치락 얽히고설키며 살아가는 땅이었으므로.

  삶의 결이 다른 여러 부족들이 최초의 블랙팬서를 따라 하나의 왕국으로 결속했으나 한 겹의 꺼풀을 들추어보면 여전한 불화의 기운이 꿈틀대는 나라. 위대한 지도자 블랙팬서의 핏줄들이 왕족이라는 그럴싸한 신분의 혈족을 이루고 있지만서도 왕좌에 누가 앉을 것인지를 두고는 서로를 경계하는 나라. 그런 것이 에릭의 눈에 비친 와칸다였다.

  동화의 파스텔 톤 색채가 덮고 있던 칙칙한 그림자를 보고 만 기분이었다. 몰랐다면 좋았겠지만 언제까지 모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동화란 것의 속성이 그러하니까.

  어릴 때부터 꿈꾸던 동화 속 세상에의 기대가 컸던 탓일까. 결국 성년이 된 에릭은 은조부가 와칸다로 귀국한 후에도 홀로 미국에 남았다. 와칸다의 왕좌 따위 어찌되든 모르겠으니 앞으로는 미국인 ‘에릭 스티븐스’로 살겠노라 스스로 다짐하면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서 자리를 잡으면 와칸다와 무관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가슴 한 구석에 묵직한 미련이 남았으니 그 까닭은 트찰라가 바로 그 와칸다에 있다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에릭이 제 마음의 한쪽 끝을 와칸다에 매어두는 이유였다.

 

* * *

 

  [이번 여름에도 안 오는 거야? 학기는 끝나지 않았어?]

  화면 너머에서 트찰라가 물었다. 물론 학기는 진작 끝났다. 이번에도 평균 A+의 과 톱을 놓치지 않는 괴물 같은 성적이었고, 다가올 하반기에는 드디어 졸업학기를 맞을 예정이다. 그 사이의 2개월 남짓한 여름휴가는 당연히 와칸다에서 보낼 것이라고, 에릭의 사촌은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유가 없는 믿음도 아니었던 터라 에릭은 미묘해지려는 표정을 다잡았다.

  “어. 끝났는데. 계절학기를 좀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커리큘럼을 한 번 찾아보지도 않은 계절학기의 핑계를 댄다. 머릿속으로는 어쩌다 줏어들었던 그럴싸한 강의의 이름들을 바삐 뒤지는 중이었다. 무슨 수업을 듣는다고 하지? 라틴어? 어학 계열은 와칸다의 통역 비즈를 지원해주겠단 말이 나올지 모르니까 역사 쪽이 낫지 않을까? 아니 그보다 웬 계절학기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지? B+ 따위를 내 성적표에 남길 순 없어서 재수강이라고 좀 재수 없어 보이게 날려 볼까? 트찰라를 상대로는 망한 농담 꼴이 나고 말겠지만. 작년엔 다음 학기를 준비할 게 많아서 못 간다고 둘러댔었지. 같은 변명을 또 써먹기는 어렵다.

  하지만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한 고민이 무색하게도, 트찰라는 ‘무슨 수업?’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다만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잠깐의 생각에 잠겨있는 것이었다. 깜빡깜빡, 말없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늘처럼 팔랑이는 그 속눈썹이 자꾸만 에릭의 시선을 끌었다. 넋을 놓고 제 사촌을 바라보던 에릭은 트찰라가 [그렇다면,] 하고 말을 꺼낼 때에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이번엔 내가 그쪽으로 갈게. 생각해보니 계속 와칸다로 오라고만 했던 것 같아.]

  “어…… 어? 온다고? 미국에?”

  벙 쪄서 물었더니 화면 속의 트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한 나머지 에릭은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주워섬겼다.

  “야, 정말 괜찮겠냐? 우리 집 좁고…… 너 있기 좀 그런데, 아니 네가 까다롭지 않은 건 아는데, 그게 그러니까, 너 우리 집은 한 번도 안 와봤으니까 지내기 어떨지, 왕궁이랑은 완전 다르다고?”

  [있어 보고 정 불편하면 아파트를 하나 사지 뭐. 갈 때 연락할게.]

  쿨하게 대꾸한 사촌이 화면 너머에서 연결을 끊었다. 스르르 사라지는 홀로그램 앞에서 뻣뻣이 굳어 있던 에릭은, 잠깐 뒤 “이게 아닌데.” 중얼거렸다.

  뒷덜미를 긁적거리는 손이 난감하다. 그러니까 트찰라와 좀 거리를 두려고, 매년 여름과 겨울을 와칸다에서 보내던 것을 이제는 그만둘 생각으로 작년부터 이 핑계 저 핑계 끌어오던 중이었는데. 도리어 트찰라가 이쪽으로 온다고 나섰다. 이래서야 의도했던 것과는 완전 반대되는 꼴이다.

  통신이 왔을 때부터 바쁘다고 매몰차게 딱 끊어버렸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한 이상, 반쯤은 예견된 결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얼굴을 보는 게 좋은데 어쩌란 말인가. 긴 속눈썹을 그늘처럼 드리운 커다란 눈이 올곧게 저를 응시하고 있으면 몸살 나게 좋아 미칠 것만 같은데. 그 예쁜 얼굴을 가지고 화면 너머의 제 머릿속이 무슨 망상을 무럭무럭 피워 올리는지 알았다면 사촌은 곧장 통신을 끊고 두 번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겠지만, 제 머릿속을 들여다볼 능력은 블랙팬서에게도 없으니까. 그래서 태연한 척 받았는데.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러지 말았어야 했지만. 정말로 거리를 두고 싶다면. 하긴 언제는 뜻대로 되었던가. 트찰라에 관한 일에서 그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을.

  내내 그런 식이었다. 충동과 욕망에 제 행동의 고삐를 내어주었던 시간들. 이번에도 에릭의 안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앉은 어린애가 방방 뛰어다니는 중이다. 트찰라가 온대! 트찰라가! 와칸다를 가지 않고도 트찰라를 볼 수 있대!

  뭐, 어떻게든 되겠지. 중얼거리며 에릭은 청소부터 시작했다. 갈 때마다 묵직한 돌이 얹힌 기분이 되는 와칸다 땅을 밟지 않아도 된다는 건 분명 희소식이었으니까. 트찰라에게 내어 줄 방을 정리하는 손길이 분주해졌다.

  그러나 정확히 닷새 뒤, 에릭은 좀 더 적극적으로 트찰라를 만류하지 않았던 저를 후회했다.

 

 

  딱히 훔쳐보려던 것은 아니었다. 숨길 생각도 없이 내놓고 다니는 등을 그냥 마주치고 만 것일 뿐. 문제는 경계심이 전혀 없는 트찰라에게 있었다. 아니 어쩌면 열 살의 그 어린 날 와칸다의 강변에서, 저처럼 물에 뛰어들도록 장난을 치며 트찰라를 꾀었던 저의 원죄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걸 보게 된 것은 재난이었다. 훤히 드러난 트찰라의 등에 꽃이 피어 있는 그 광경을. 어릴 적에 보았던 옅은 색의 나뭇가지에, 만개한 꽃송이가 하나도 아닌, 세 개나.

  수건을 덮어 쓴 머리를 털며 욕실을 나오는 트찰라의 등에서 꽃의 형상을 발견한 순간 에릭은 들고 있던 물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야, 사촌, 너……”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트찰라가 무구한 얼굴로 에릭을 돌아보았다. 뭐가 문제인지 하나도 짐작하지 못한 얼굴로. 거기다 대고 꺼낼 말이 궁했다. 피스틸의 등에 꽃이 피는 것은 한 가지 경우뿐이다. 피스틸과 반대되는 속성의, 스테먼이라 불리는 자들과 몸을 섞었을 때. 스테먼이 지닌 꽃의 씨앗이 피스틸의 몸 안에 뿌려졌을 때.

  너 혹시 남자랑 섹스했냐.

  그놈이 네 안에 쌌냐.

  제정신으로 건넬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왜 그래?”

  트찰라가 여전히 무구하게, 하지만 의아해하며 물어왔다. 에릭은 움찔했다. 먼저 부른 건 분명 저였다. 불렀으면 용건이 있어야 할 터.

  “……너…… 덥냐? 에어컨 틀었는데.”

  “응, 좀.”

  “그래…… 그러냐…….”

  이게 뭐하자는 대화인가 싶다. 하지만 말을 얼버무리는 에릭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시발, 어떤 새끼야. 어떤 새끼가 콘돔도 안 쓰고. 등짝을 한번 목도했을 뿐인데 과도하게 밀려든 정보량에 아득해진 에릭은 “조심해서 잘 자라…… 덥다……” 따위의 말을 웅얼거리며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닫힌 문에 쿵, 뒤통수를 들이박고는,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속으로 씩씩거리면서. 한 번 더 쿵, ‘시발 어떤 새끼냐고.’ 욕설을 아득아득 씹으면서.

  심지어 꽃은 세 종류였다. 피스틸의 등에 피어나는 꽃은 관계한 스테먼의 속성을 따른다. 그러니까, 트찰라의 등에 만개한 꽃의 주인은 각각의 세 놈이라는 얘기였다. 세 명. 트찰라가 몸을 섞은 게. 다리를 활짝 벌려 맞아들인 게.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세 놈씩이나. 눈앞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다시금 욕설이 새어 나왔다.

  ‘시발, 트찰라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헤프게,’ 까지 생각한 에릭은 다음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엔 뻑! 힘을 잔뜩 실어 아예 작살낼 기세로 문을 들이받았다. 얼얼하게 후려맞은 듯한 눈앞에 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오, 시발……”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그러나 방금 얼간이 같은 생각을 떠올렸으니 이 정도는 되어야 정신을 차릴 터. 트찰라가 누구랑 뭘 했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마지막으로 와칸다에서 그를 본 게 재작년 겨울. 작년 여름부터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와칸다행을 미뤄 왔던 자신이다. 그 사이에 트찰라가 누구랑 사귀고 섹스를 했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아니 제가 그 사이 와칸다를 꼬박꼬박 방문했어도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트찰라가 연인과 사랑을 나눴건 말았건 그게 사촌과는 대체 무슨 상관인데.

  그럼에도 뱃속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는다. 이것이 완벽히 부당한 분노임을 알면서도 배알이 뒤틀렸다. 이유는 스스로가 가장 잘 느끼고 있었다. 트찰라가 선택한 것이 제가 아니기 때문에.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세 명의 빌어먹을 자식들이 트찰라의 위를 올라타는 동안, 저는 그것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여간 제정신 아니지, 에릭 스티븐스……”

  스스로에게 무슨 말을 퍼부어도 모자랐다. 돌아버린 새끼. 미친 놈. 대가리가 어떻게 된 거냐, 대체. 하여간, 와칸다에서 가장 위험한 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지.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트찰라가 가장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건, 바로 자신이었다. 다른 놈을 선택해서 화가 난다고? 돌아버릴 것 같다고? 그럼 트찰라가 네 암컷인 줄 알았냐, 미친 자식아.

  다시 한 번 쿵, 뒤통수를 문짝에 들이박은 뒤 에릭은 한참 동안을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긴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로 꾸물꾸물 기어들어갔다.




쓰는 제가 늘어져서 텐션을 좀 찾을려고 상편 먼저 올립니다.
리퀘 주신 내용 전체 정리는 하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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