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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찰] 화해의 시간 (下)

블랙팬서 / 몽찰

쩜오 이후에 올리려고 했는데,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미리 올립니다.




* * *

 

  기어이 쏟아지는 울음소리에 에릭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결투 의식에서 혹시 죽는다면, 이라는 단서로 트찰라가 당부를 남기던 중이었다. 정당한 결투이니 결과에는 승복할 것이지만 남겨질 왕대비와 동생만큼은 부탁드린다는 말에 원로들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으나 트찰라의 동생은 도리어 눈물이 터져버린 모양이다.

  “왜 이래야만 해? 지금이라도 거부하면 안 돼?”

  슈리라고 했던가. 아직 스무 살도 채 못 되어 보이는 어린 사촌동생이 트찰라에게 매달려서는 울음을 섞어 떼를 쓰는 그 소리가 몹시도 듣기 싫었다. 아주 귀에 거슬렸다. 20년도 더 전의 그날에, 쓰러진 아버지를 발견했던 자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몸을 끌어안고 울기만 했던 그때의 자신이, 지워버리려 해도 자꾸만 눈앞에 선했다.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좆같았다.

  “왕족의 권리야.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말하며 트찰라가 동생을 떼어 냈다. 눈물을 벅벅 훔쳐낸 슈리가 이번엔 에릭을 노려보았다. 곁눈질하다 눈이 마주쳐 버린 에릭은 그녀에게 사납게 웃어주었다. 맹수의 경고처럼 이를 드러낸 소리 없는 웃음에 슈리가 주먹을 불끈 말아 쥔다. 그걸 본 트찰라가 급히 말했다.

  “끼어들 생각 하지 마. 아니, 아무 것도 하지 마. 결투 의식을 방해한 게 되면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해.”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절대 지지 마! 죽으면 죽을 줄 알아!”

  그렇게 말한 슈리가 울음을 참는 얼굴로 왕대비 라몬다의 옆자리에 섰다. 트찰라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전사의 폭포 한가운데, 에릭을 마주보는 위치로 돌아왔다. 그 모습까지 말없이 지켜본 에릭은 비틀리는 심경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냈다. 아주 꼴값들 하고 있네.

  겨우 거슬리는 울음소리가 사라졌지만 에릭의 기분은 이미 진창을 구르는 중이다. 결투를 끝까지 거부하는 트찰라를 몰아세워 어찌 이 자리까지 끌어내기는 했는데, 에릭이 원하던 그림과는 거리가 백만 광년쯤은 벌어져 있었다. 이런 식으로 친족과 싸울 수는 없다고 계속해서 버텼던 트찰라의 편으로 원로들이 역시 많이 기울어진 탓이다. 그 탐탁찮아하는 기류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이래서야 얻을 수 있는 게 뭔가. 결투에서 이기더라도 트찰라를 죽였다간 에릭을 왕으로 모시지 못하겠다는 부족들이 각각의 세력으로 찢어질지도 모른다. 결투의 결과로 손에 쥐는 것이 고작 와칸다의 부서진 조각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이 자리에 선 다음에서야 에릭은 깨달았다.

  시발, 짜증나는 새끼. 나를 완벽히 악역 포지션으로 몰아넣고. 저는 선량하고 고결한 척.

  무엇보다 불쾌하고 찝찝한 것은 놈이 이런 그림을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계속 애매하다는 것이었다. 이쪽을 보는 저 사슴눈깔은 다 연기에 불과하다고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고 있었지만, 사실 에릭은 트찰라의 말들이 진심인지 아닌지 자꾸만 헷갈렸다. 덕분에 정당한 복수와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놈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하긴 언제는 제가 악당이 아니었던 적이 있나. 이런 취급에는 익숙하다. 와칸다에서라고 달라질 이유가 딱히 있었던 것도 아닌데, 뭘 기대했던 건지. 여긴 어차피 저 자식의 홈그라운드다. 그 정도 핸디캡은 각오하지 않았던가.

  비록 지금의 모양새가 ‘트찰라 전하’의 하해와 같은 아량 덕분에 억지로 결투의 기회를 얻어낸 꼴이지만. 이 모양새 때문에 일대일 결투의 자리에 트찰라를 끌어내었음에도 도저히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원하던 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었지만. 시발. 어쨌든 방법은 있을 것이었다.

  왕좌를 뺏고 나면 군사를 틀어쥐고 윗대가리부터 싹 갈아치운다. 원로라고 해봐야 어차피 신수가 훤하신 꼴들로 자기들 몸보신밖에 생각지 않는 작자들이다. 그들을 치우고 나면 떡고물을 노려서든 에릭의 생각에 동조해서든, 말을 들을 자들은 어디에든 있을 거였다. 이를테면 와카비라는, 보더 부족의 국경 수비대장이라든가.

  바깥세상이 알았다간 눈이 돌아갈 기술력과 몇 천 년을 캐내도 고갈되지 않는 비브라늄을 가지고서 언제까지 숨어 지낼 거냐는 말에 눈빛을 번뜩였던 그의 얼굴을 에릭은 상기했다. 그는 보더 부족이면서도 에릭이 트찰라의 손에서 클로를 한 번 빼돌렸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자들이 와카비만은 아닐 터. 그들을 골라 직책을 주고 손발처럼 쓰면 된다. 어떻게든 왕좌에만 앉으면 방법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지만, 불쑥 불안감이 독사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정말 방법이 있나? 나는 지금 도대체 뭘 하는 거지? 왜 여기에 서 있는 건가? 뭘 위해서 저 자식과 마주보고서……?

  차분한 눈깔로 이쪽을 바라보는 트찰라를 노려보며, 에릭은 수차례 욕설을 삼켰다. 울컥 화가 끓고 말아서 에릭은 갑갑한 조끼와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때껏 옷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킬 카운트의 문신이 모두의 눈앞에 드러났다. 상반신의 거의 전부를 덮고 있는 우둘투둘한 문신을 본 트찰라의 눈이 당혹감으로 커졌다.

  “그건…….”

  그래. 그래줘야지. 놀라고, 두려워해줘야지. 킬몽거를 봐 온 많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래야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지 않은가.

  에릭은 이를 갈며 내뱉었다.

  “왜. 이렇게 죽인 놈 처음 봐? 백인이든 우리 동족이든 죽일 때마다 하나씩 새겼지. 그때마다 너를 생각했어. 미국에서, 아프간에서, 이라크에서, 심지어 여기 아프리카에서도. 그건 다 이 자리에서 널 죽이기 위한 거였다!”

  트찰라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스스로에게 쏟아 붓는 말이었다. 그래. 이 모든 건 저 자식을 죽이고 와칸다의 왕좌에 앉기 위한 것이다. 흔들리지 마라. 킬몽거. 흔들리는 놈이 먼저 뒈진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잖아.

  결의와 살의를 눌러 담아 창끝을 겨누었더니 트찰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그는 몹시 괴로워하는 듯한 얼굴이다. 마치 에릭의 창에 벌써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곧 트찰라는 다시 눈을 뜨고 에릭을 쳐다보았다. 에릭을 자꾸만 현혹시키는 커다란 사슴눈깔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저 자식, 지금 울 뻔한 건가? 제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에릭이 미간을 찌푸리는데, 트찰라는 에릭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너와는 싸울 수 없어.”

  “……항복하겠다고?”

  “아니. 너에게 왕좌를 넘겨줄 생각도 없어.”

  “그러면 내가 널 죽이고 왕좌를 가져가는 걸 구경이나 해.”

  “네 손에 죽을 생각도 역시 없다.”

  방패를 들어 올리며 트찰라가 고집스레 말했다. 네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이도 저도 하지 않겠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 커다란 눈에 서린 결심만은 굳건해 보였다. 에릭은 황당하기까지 한 기분을 삼켰다. 저 자식 정말 진심인가? 정말 진심으로 나와는 싸울 수 없다고 계속 버티는 건가?

  아니, 아니다. 저런 뻔한 싸구려 연기에 속아 넘어가면 킬몽거의 이름이 웃는다. 넘어가지 마. 원로들이 보고 있어서다. 저 자식이 영리한 거지. 컨셉을 한번 잡았으면 끝까지 유지해야 하니까.

  시발, 촉촉하게 젖은 사슴눈깔에 기다란 속눈썹을 팔랑이며 펼치는 연기력이 어찌나 대단하신지, 깜빡깜빡 속아 넘어갈 지경이었다. 저 자식이 진심인 것 같다고 자꾸만 생각해버리는 자신이 몹시 짜증났다. 이렇게 흔들리고 동요하는 것은 놈이 의도하는 바라고 스스로에게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정말 진심이면 어떡하지, 따위를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똥멍청이 같은 생각인데도 자꾸만 뇌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혼란에 빠진 에릭과는 달리, 한층 단단해진 얼굴의 트찰라가 주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때까지 망설이던 주리가 결국 결투의 시작을 선언했고,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에릭은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일단 거슬리는 방패부터 치워낼 생각으로 팔과 다리를 노렸으나 방어 태세가 만만찮았다. 날아드는 칼날을 날렵하게 막아낸 트찰라가 목청 좋게도 외쳤다.

  “항복해, 은자다카! 나는 너에게 항복하지 않을 거고, 죽지도 않을 거다!”

  웃기는군. 과연 언제까지 그런 헛소리를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에릭은 이를 갈아붙이며 무기를 휘둘렀다.

  “트찰라, 눕혀버려!”

  슈리의 응원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지랄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에릭은 공격을 이어나갔다.

 

* * *

 

  몇 번 부딪쳐 보니 알 수 있었다. 이 자식과는 어영부영 싸워서는 결코 결판이 나지 않으리란 것을.

  이길 수 없는 상대는 아니지만 손쉬운 상대도 아니다. 미 해군 특수부대 중에서도 가장 하드코어한 곳들만 골라서 섭렵한 자신이지만 트찰라 역시도 따로 오랫동안 훈련을 받았던 것인지 움직임이 만만찮았다. 적당히 봐주며 싸워서는 턱도 없고 완전히 죽일 작정으로 덤벼야 제압이 가능하다. 아니라면 계속 시간과 체력만 소모할 뿐.

  문제는, 그걸 알겠는데, 시발, 저 자식도 제대로 된 공격은커녕 방어만 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조져 놓을 타이밍인 것은 알겠는데, 자꾸 망설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고도로 집중해서 빈틈이 드러난 순간을 맹렬히 쫓아 칼날을 처박아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있는 이쪽의 반응 속도가 평소보다 몇 배는 느리고 둔하다. 그 사이 놈은 가드를 세워 드러났던 빈틈을 숨겨 버리니, 에릭의 공격은 허무하게 방패나 때릴 뿐.

  이렇게까지 공격이 둔해진 것은 창날로 트찰라의 뺨을 그은 직후부터였다. 페이크를 걸고 창을 질러 넣어 놈의 뺨을 베어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창날이 살갗을 스치는 감촉이 소름 돋도록 짜증이 났다. 손에 생생히 전달되어 온 남의 살을 베어내는 느낌. 몹시 기분이 더러웠다.

  평소의 에릭이라면 상대를 한 방 먹였다는 사실에 더욱 흥이 돋아 씨익 사납게 웃어 보인 후, 팔다리를 한 차례씩 그어 움직임을 봉쇄했을 것이다. 그리곤 무릎을 꿇려 뒷덜미를 잡아당긴 후 최종적으로 목줄을 따 죽여 버렸을 것인데, 오늘만큼은 그런 식으로 싸울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손에 든 것이 날붙이라서 오히려 더 집중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차라리 잡은 것이 총이었으면 나았을까? 방아쇠만 당기면 저 자식의 심장에든 뇌수에든 총알을 박아 넣을 수 있는 간편한 무기인 쪽이 더 나았을까?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살상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적절한 수준의 살의가 필요한 날붙이 따위라서 문제인 것일까?

  놈을 죽이기에는 내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니다. 이렇게 헤매는 꼴을 계속 보이는 것은 저 자식이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날 죽일 생각도 없고 죽지도 않을 거라던 놈이, 내 손에 치명상을 입을까봐 몸을 사리기 때문이다.

  에릭은 결국 양손에 든 무기를 팽개쳐 버렸다. 그리고 맨손을 들어 보이며 트찰라를 도발했다.

  “다 놓고, 주먹으로 싸워. 방패 뒤에 숨지 말고.”

  트찰라는 에릭의 도발에 잠깐 멈칫하더니 마찬가지로 창과 방패를 던져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에릭은 사납게 웃었다. 이제야 좀 시원하게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홀가분해진 에릭은 잠깐 거리를 가늠하다 그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저 거슬리는 면상에 주먹을 꽂아줄 셈이었다.

  하지만 트찰라가 잽싸게 몸을 피하면서 동작이 커졌다. 아차 하는 순간, 주먹을 흘려 비낀 트찰라가 에릭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렇게 반격을 허용하고 말았지만 에릭도 마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물을 튀기며 구르면서도 트찰라의 발목을 낚아챘고, 트찰라가 휘청 균형을 잃는 틈에 빠르게 일어나 복부에 어퍼컷을 한 방 먹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음 타격을 먹이려는 순간에 트찰라의 무릎이 에릭의 옆구리를 후려갈겼고, 에릭은 연속타를 포기하고 빠르게 굴러 뒤로 빠졌다. 조금 전의 일격이 제대로 명치에 박혔으면 트찰라는 숨도 못 쉬고 그대로 엎어졌을 터다. 하지만 디딤이 불안정해 주먹이 엇나간 느낌이다 싶더니 역시나 바로 반격을 먹었다. 쳇, 혀를 찼지만 아주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욱신대는 옆구리의 통증을 눌러 참으며 에릭은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자세를 추스르고 트찰라와의 간격을 가늠하고 있으니 트찰라의 뒤쪽이 낭떠러지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위치가 나쁘지 않다. 놈의 뒤쪽으로 공간이 얼마 없었다. 트찰라도 불리함을 느끼는지 조금씩 스텝을 옮겨 옆으로 몸을 빼내려는 중이다.

  그렇게 둘 수야 없지. 구석에 몰린 상대방이 빠져 나올 여유를 주어서야 되겠나.

  에릭은 트찰라가 주춤주춤 위치를 옮기는 것을 견제하다가 다시 물을 차올리며 공격을 가했다. 바닥이 온통 물이니 관절기를 걸고 물속에 얼굴을 처박으면 숨이 막혀 뒈지거나 항복을 하거나 둘 중 하나로 끝이 나리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에릭의 의도를 읽기라도 한 듯 트찰라도 몸을 빼내는 속도가 만만찮았고, 좀처럼 붙잡히지 않았다. 에릭은 공격이 막히는 와중에도 계속 몰아치며 트찰라를 폭포 끄트머리로 몰아갔다. 간신히 놈의 어깨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트찰라가 무게의 균형을 바꾸며 메치듯 에릭을 넘겨 던졌고, 에릭은 연속기를 피할 요량으로 몸을 빼면서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입지가 좋지 않았다. 트찰라가 넘겨버린 뒤쪽, 폭포 쪽으로 발이 삐끗 미끄러진 것이었다.

  빌어먹을! 아찔하게 몸이 기우는 느낌이 덮쳐왔지만 에릭은 균형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때 에릭의 시야에 완전히 당황한 얼굴의 트찰라가 손을 뻗어오는 것이 보였다. 트찰라가 다급히 에릭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폭포의 끝 허공으로 넘어가는 에릭의 무게를 지탱할 만큼의 균형은 그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둘은 뒤엉키듯 함께 폭포 아래로 떨어졌다.

  당황한 원로들과 슈리, 주리의 비명 같은 갖가지 소리가 에릭의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떨어지는 순간의 에릭은 그런 것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오로지 하나의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식이 왜?

  왜 나를?

  나를 구하려고 왜 이렇게까지?

  풍덩! 하강의 시간은 길지 않았고, 둘은 폭포 아래의 차가운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입수를 대비하지 못한 채 높은 절벽에서부터 수면에 던져진 충격이 상당했다. 일순 정신을 잃을 뻔했으나 에릭은 물을 잔뜩 먹고 가라앉는 대신 허우적거리며 위로 올라왔다.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 있으니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쪽의 수면 위로 트찰라도 고개를 내밀었고, 둘은 급류에 휩쓸렸다가 간신히 뭍으로 빠져나왔다.

  쿨럭거리며 물을 뱉어내고 숨을 헉헉 고르면서 둘은 서로를 잠깐 쳐다보았다. 긴장한 시선의 교환. 아직 결투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의 눈빛이었다. 먼저 자세를 고쳐 잡은 것은 에릭이었다. 맞서기 위해 트찰라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대로 달려드는 대신, 에릭은 언성부터 높였다.

  “시발, 너 뭐야?”

  “……뭘 묻는 것인지 모르겠다. 은자다카.”

  되묻는 트찰라는 몹시 당혹한 표정이었다. 그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는데 그게 또 복장이 터졌다.

  “시발, 그렇게 부르지 마! 아니, 필요 없어! 뭐라 부르든! 보는 눈도 없는데 연기나 때려치워! 짜증나니까!”

  “……연기 같은 것도 한 적 없다.”

  “웃기지 마! 결투 중에 구하겠다고 뛰어내리는 척까지 했으면 점수는 충분히 땄잖아?”

  에릭이 으르렁거리자 잠깐 눈을 굴리던 트찰라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짐작 가는 것이 있다는 투였다.

  “부족 의회장에서 비브라늄 도둑 취급을 했던 건 미안했다.”

  뭐? 저게 왜 지금 나오나 싶어 에릭은 어이없이 트찰라를 쳐다보았다. 트찰라는 에릭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더 난감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비브라늄을 너 같은 놈으로부터 지키는 게 와칸다의 왕이 해야 할 일이라고 했던 것 말이다. 미안했다. 그 말은 지나쳤어. 네 목적을 의심했었기 때문에 했던 말이었다. 나는 클로와 마찬가지로 너도 비브라늄을 탐내서 와칸다에 왔다고 생각했다. 로스가 너는 무수한 사람을 가책 없이 죽이고, 암살하고, 정부를 전복시켜 왔다고 그래서…….”

  “그게 목적인 거 맞는데? 비브라늄 아니면 이따위 나라에 왜 왔겠어? 눈 돌아가는 기술력이 있으면서도 쓸 줄도 모르는 나라에 그걸 차지할 생각이 아니면 왜 왔겠냐고, 내가? 당연히 금속 탐지기에도 걸리지 않는 가장 단단한 물질로 만든 첨단 무기가 잔뜩 있기 때문이지.”

  에릭이 빈정거리자 트찰라는 말을 잃은 것 같았다. 분명히 첫 대면 때에도 똑똑히 말했던 것 같은데, 저 자식은 무슨 생각을 하느라 까먹은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잠시 뒤 트찰라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는 듯 되물었다.

  “그 무기를 가지고 어쩔 생각이냐. 전쟁이라도 벌일 셈이야?”

  “그래. 전쟁. 그거 좋지. 비브라늄 무기로 전 세계 워독들을 무장시키고 각국 수뇌부터 해치우면 일이 아주 쉬울걸.”

  “그렇게 하면 네가 증오하는 자들과 똑같아진다는 생각은 왜 못하지? 갈라놓고, 정복하고! 네 말대로 했다간 와칸다는 물론이고 전 세계가 함께 멸망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친다고! 넌 아무 죄 없는 사람들한테서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고 싶어?”

  “너희 아버지도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았어! 아무 죄 없는 내게서!”

  그렇게 버럭 외친 순간, 에릭은 자기 자신의 외침에 도리어 놀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트찰라는, 에릭의 목소리가 마치 비수라도 되어 심장을 찌른 것처럼 괴로운 얼굴을 했다.

  또 저 얼굴이었다. 뭔데 네가 그렇게 괴로운 얼굴을 해? 마치 내 괴로움을 이해한다는 듯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에릭은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어 트찰라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잠시의 침묵 뒤에, 트찰라가 말을 꺼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과할 수 없단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아버지가 너에게 했던 일로 나 자신을 정의할 생각도 없어.”

  아하, 그러셔, 라고 빈정거리며 받아치려던 에릭은, 그러나, 다음 순간 트찰라가 이어서 건네 온 말에는 완전히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 괴로웠던 걸 그동안 알지 못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어. 와칸다의 왕, 와칸다의 수호자…… 그 의무를 나는 와칸다를 숨기고 비브라늄을 훔치러 오는 자들을 막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내 무지와 무관심을 용서해 줘. 미안해. 미안하다, 은자다카. 미안해.”

  맥이 탁 풀렸다. 에릭은 굳어버린 채로 멍청하니 서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로. 그건 마치 마법의 주문 같았다. 모든 적의가 녹아내리게 만드는 강력한 무장해제의 주문. 어쩌면 와칸다에 올 때의 자신은, 트찰라에게서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허탈할 정도로 모든 것이 쉽게 풀려버린 자신을 느끼며 에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저를 아는지 모르는지, 트찰라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다른 방식이 있을 거야, 지금처럼 왕좌를 놓고 결투를 하는 게 아니라, 좀 더 다른……. 그걸 찾아볼 수 있게 1년만 시간을 줘. 오늘은 누구의 승리도 패배도 아닌 것으로 하자. 우리는 이제야 만났고, 너에게 나를 설명하기는커녕 내가 너를 이해하기에도 시간이 충분치 않았어. 그러니 1년만. 시간을 줘.”

  “…….”

  “1년 뒤에 다시 네가 도전할 마음이 든다면, 나는 그때는 진심으로 너를 맞아 싸우겠다. 혹은……, 네가 옳다고 여기게 되면, 결투에 응하는 대신 왕좌를 네게 넘기겠지. 그때까지 시간을 줘.”

  그렇게까지 말한 트찰라는 잔뜩 긴장한 커다란 눈으로 에릭을 쳐다보았다. 에릭이 이미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는 것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얼굴이다. 그 사실을 일러줄까 하다가, 에릭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에릭이 대꾸하자 트찰라는 몹시 안도한 것처럼 웃었다. 정말로 기뻐하고 다행스러워하는 그를 앞에 두고서 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가슴이 막막했다. 도대체 이 기분이 뭘까. 뭔데 이렇게 막막하고, 아득하고,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걸까.

  에릭이 그저 침묵한 채로 제 감정을 곱씹는 동안 트찰라는 비척비척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자기 팔다리도 축축 무겁게 늘어지고 있는 것을 깨달은 에릭이 그를 따라 주저앉으니, 트찰라는 피식 숨 빠지는 웃음을 웃고는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그 뒤로 트찰라와 주고받은 말은 없었지만 그저 이렇게 눕고 앉아만 있는데도 에릭은 어쩐지 모든 것이 충만해진 느낌을 받았다. 그 상태로 그는 다시 제 가슴속에 차오르는 감정을 곱씹었다.

  도대체 이 기분은 뭘까. 뭔데 이럴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폭포 아래로 뒤엉켜 떨어진 왕과 도전자를 찾아낸 원로들과 사람들이 부랴부랴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거의 울먹이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슈리는 제 오빠가 드러누워 있고 에릭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예 에릭을 죽일 기세로 달려왔다. 그러다 트찰라가 어기적어기적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는 멈칫 멈춰 섰다.

  “어떻게…… 된 거야? 끝났어? 오빠가 이겼어?”

  “아니. 아직 아니다. 은자다카는 패배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이긴 것도 아니지만. 1년 뒤에도 도전할 생각이라면 그때 다시 도전을 받기로 했다.”

  “뭐?”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슈리가 둘을 바라보았다. 트찰라는 마냥 웃을 뿐이었다.

 

* * *

 

  결투 의식은 승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끝났다.

  패자의 항복 또는 죽음으로만 끝을 맺어 왔던 결투 의식에서 이는 유례없는 파격이었으나, 의식을 주관한 주리는 오히려 트찰라와 은자다카 중 어느 쪽도 사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두 사람의 선대에서 바로 자신 때문에 트차카 왕이 동생 은조부를 살해하고 마는 광경을 목격했던 주리에겐, 트찰라가 살아남든 은자다카가 살아남든 대를 거듭한 악몽이 될 뿐이었으니까. 그는 재현되는 과오를 막기 위해서라면 둘 중 한 명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뛰어들어 가로막을 결심까지도 하고 있었다. 결투 의식에 끼어든 자는 그 대가를 자기 목숨으로 치르게 될 수도 있음을 와칸다의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원로들은 결투 의식의 승자가 없는데다 1년 뒤 조건부로 재개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연이은 파격에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나 곧 이어진 트찰라의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은자다카와 싸우고 싶지 않았고,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년의 유예를 제안했고, 은자다카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1년 동안 은자다카는 제 옆에서 와칸다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후에도 그가 여전히 결투를 원한다면 나도 그에 응할 겁니다. 그때에 원로 여러분께서는 결투의 증인으로서 다시 한 번 자리에 참석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트찰라는 ‘혹은, 1년 뒤에는 제가 왕위를 은자다카에게 넘겨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라고 덧붙임으로써 원로들이 몹시 복잡한 심경이 되게끔 만들었다.

 

 

  하트 허브의 은은한 보라색 광채가 사원의 허브 밭을 꿈처럼 떠돌고 있었다. 주리는 밭을 신중하게 돌아보며 허브 두 개를 조심스럽게 골랐다. 꽃받침 속에 손을 넣어 보랏빛 보석 같은 열매를 따낸 다음엔, 그것을 작은 절구에 넣어 찧어낸다. 결투의 동안에는 거두었던 블랙 팬서의 힘을 트찰라에게 돌려줄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가 고른 허브가 하나가 아닌, 두 개인 이유가 있었다.

  ‘은자다카의 것도 부탁합니다. 주리.’

  ‘……트찰라. 하트 허브는 와칸다의 왕을 위한……’

  ‘나는 아버지가 살아 계시던 때에도 이미 블랙 팬서였죠. 그건 왕이 된 자만 하트 허브의 힘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란 뜻이고.’

  ‘그건 그렇지만……’

  ‘부탁합니다.’

  그렇게 말한 트찰라는 깊은 눈으로 주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주리는 언젠가, 최초의 결투 의식을 끝내고 하트 허브의 힘으로 선조들의 세상을 다녀온 트찰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거기 계셨어요. 거기에, 아버지가. 잠시 뒤 트찰라의 생각을 짐작해 낸 주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은자다카. 이쪽으로.”

  하트 허브가 준비되자 트찰라가 손짓하며 은자다카를 불렀다. 그때까지도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 짐작하지 못한 은자다카가 얼굴을 구기고서 걸어왔다.

  그 표정에 작은 웃음이 나오려 했으나, 주리는 진중한 표정으로 웃음을 감추고선, 에릭과 트찰라가 누울 자리를 가리켰다. 사원의 한가운데에 두 사람이 누울 만큼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주리는 에릭과 트찰라에게 각자의 발을 반대 방향으로 두고, 머리는 서로에게 가까이 한 자세로 누워줄 것을 말했다.

  “뭐야. 왜 나도 여기에 눕는 건데?”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 은자다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주리가 도와줄 거야.”

  투덜거리는 에릭을 달래며 트찰라가 먼저 자리에 누웠다. 그 상태로 그가 다시 재촉하듯 손짓하자 에릭 역시도 마지못해 트찰라와 머리를 맞대듯 누웠다. 두 사람은 그렇게 누운 채로 주리가 내민 허브 즙을 들이켰다.

  눈을 감은 그들의 위로 보드라운 흙을 이불처럼 덮어 준 주리는 그들 두 사람에게 선조들의 영혼이 깃들어 그들을 선조의 세계로 초대하기를 청하며 기다렸다. 두 명의 블랙 팬서가 동시에 허브를 마시고 의식을 치른 적은 여태껏 없었던 일이지만, 일이 잘못되리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선조의 세계에서의 시간은 지상의 것과는 다른 속도로 흐르니, 둘은 아마 충분히 많은 것을 보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선조이시여. 위대한 선조이시여…….

  눈을 감고 읊조리며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냈을까. 트찰라와 에릭이 거의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둘의 위를 덮었던 흙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들을 진정시키고 있자니, 에릭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거?”

  허브의 즙을 마실 때도 몹시 미심쩍어 하더니, 깨고 난 다음에도 에릭의 반응은 영 얼떨떨한 것에 가까웠다. 반면 트찰라는 무엇인지 모를 여운에 그윽히 젖어 있다가 에릭을 돌아보았다.

  “이거 완전 향정신성 약물 아냐? 시발, 이런 걸 키우고 있었어, 와칸다는?”

  “음. 은자다카. 하트 허브는 신성한 식물이다. 그런 표현은 좀…….”

  “신성 좋아하네. 다 환각이잖아. 신경계에 작용해서 헛것이나 보여주는. 이런 걸 마약이라고 하거든? 나 같으면 싸그리 불태운다.”

  에릭의 거친 표현에 트찰라가 조금 난감하게 눈을 굴렸다. 그는 주리의 눈치를 보다가 담요를 받아 걸치고는, 다른 하나를 에릭에게 건네주었다.

  “글쎄. 은자다카. 정말로 그분들이 너와 내 안에 있다고 느껴지지 않니?”

  트찰라가 그렇게 묻자 에릭은 뭔가 대꾸할 듯 인상을 썼다가, 입을 텁 다물어 버렸다. 그 얼굴을 본 트찰라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이미 해가 졌구나. 내일은 어때, 은자다카. 와칸다의 석양은 바셴가 산에서 볼 때 가장 아름답거든. 그걸 보여주고 싶은데.”

  “그만하지?”

  에릭이 툭 뱉는 말에는 그러나 독기가 빠져 있었다. 트찰라 역시 그것을 알았는지 빙긋이 웃었다. 작게 흩어지는 사촌 형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에릭이 다시 투덜거렸다.

  “갑자기 너무 들이댄다, 사촌? 그거 한번 봤다고 다 본 것처럼?”

  “들이대? 무슨 뜻이냐, 은자다카.”

  “……아니, 됐다. 내가 말을 말지.”

  옆에서 지켜보는 주리로서는 그들이 과연 무엇을 보고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유예의 1년 뒤 그날, 주리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두 사람의 결정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화해의 시간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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