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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찰] 화해의 시간 (上)

블랙팬서 / 몽찰

<들어가기 전에>

스포일러 주의 : 마블 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결말부에 대한 스포일러도 있습니다. 다만 <인피니티 워>의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if 설정 : 영화 <블랙팬서>의 특정 장면에서, 내용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면 뒤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if 설정을 기반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따라서 원작과는 다른 결말입니다. 하지만 결말부가 달라도 원작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은 다소간 포함하고 있습니다.



화해의 시간

written by 소으름

  

 

  은색의 조금 투박한 반지는 트찰라의 손가락에 미끄러지듯 끼워져 들어갔다. 살인귀로 자라난 사촌이 가져온, 죽은 삼촌의 반지. 트찰라가 물려받은 아버지 트차카의 것과 똑같이 생긴……. 트찰라는 그것을 침통하게 바라보았다.

  주인의 사망 이후 오랫동안 누구의 손에도 끼워진 적이 없는 듯한 그 반지에서, 트찰라는 긴 세월의 흐름을 읽었다. 에릭 킬몽거는, 은자다카는, 이것을 손에 끼고 다니진 않았어도 몸에서 한시도 떼어놓지 않았던 것 같다. 율리시스 클로를 빼돌리던 그때도 목에 걸고 있다가 트찰라에게 보이고 말았으니까…….

  트찰라가 앉은 왕좌의 주변은 이루 말하기 어려운 기묘한 공기에 감싸여 있었다. 선왕의 친족 살인에 대한 킬몽거―은자다카의 폭로와 왕위계승에의 도전 선언, 웅성거리며 왕족의 권리를 언급한 원로들의 나지막한 목소리, 왕대비 라몬다의 날카로운 반박의 외침 같은 것들이 한 차례 급박하게 지나간 이후의 실내에는 팽팽한 긴장감만이 가득하다. 상황을 정리할 트찰라의 결정을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으나 트찰라는 침묵 중이었다. 왕궁으로 돌아오기 직전 나키아가 해주었던 말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당신의 아버지조차도. 당신 아버지가 한 일로 당신의 존재를 정의하지 말아요.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는 자기가 결정하는 거니까.

  트찰라를 상념 속으로 잡아당기고 있는 것은 그녀의 목소리뿐만은 아니었다. 뇌수를 후려갈기는 듯하던 에릭 킬몽거의 일갈, 그것 역시도 트찰라의 귀를 생생히 울리고 있었다.

  넌 왕의 아들이 아니라 살인자의 아들이야!

  살인자.

  트찰라 역시도 누군가를 그렇게 부르며 목숨의 값을 요구했던 때가 있었다. UN에서 폭탄 테러로 사망한 아버지 트차카의 복수를 위해서. 그때 트찰라는 와칸다를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의 값을 받아내기 위해 블랙 팬서의 수트를 입었었다.

  범인을 좇아 시베리아까지 갔었던 그때를 트찰라는 다시 떠올렸다.

  시릴 듯한 창백한 백색의 설원. 그곳에서 트찰라는 자신이 복수의 대상을 잘못 지목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모든 일을 계획한 진짜 테러범의, 너무도 깊어 바닥조차 닿지 않는 복수심을 보았었다. 그자의 덫에 속절없이 휘말려 결속을 무너뜨리고 만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보았었다. 일의 전말을 알게 된 그때, 트찰라는 결심했었다. 이 광기의 감정이 저들도 모자라 자신까지 삼키도록 놔두지는 않겠다고.

  그때 피로서 아버지의 목숨값을 치르게 하는 대신 테러범을 생포해 CIA에게 넘겼던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와칸다에까지 닿을지 모르는 복수의 연쇄를 끊기 위해서였다. 이후로 더는 같은 종류의 일에 말려들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불운히도 그러지는 못할 모양이다. 새로이 뻗어온 또 다른 은원의 고리에 지금 그의 목이 죄여드는 중이었으니까. 그것은 트찰라가 전혀 알지 못했던, 그리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묻힌 과오로부터 비롯한 것이었다.

  트찰라는 반지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껏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은자다카와 시선이 마주친다. 대답을 해야 할 때였다. 와칸다의 왕으로서. 다시금 뻗어온 이 복수의 연쇄에.

  천천히 입을 열어, 트찰라는 에릭―은자다카에게 대답했다.

 

 

  “도전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에릭은 꿈틀, 이를 드러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곧 만면에 비웃음을 띄웠다.

  “겁나냐, 사촌? 하긴 넌 클로를 못 잡았으니까. 난 놈의 시체를 여기까지 가져왔는데. 내가 무서워? 붙었다간 바로 왕좌에서 끌어내려질 것 같아? 그래서 피하냐? 그러고도 네가 블랙 팬서야?”

  에릭의 비웃음은 왕좌를 둘러앉은 원로들에게도 향했다.

  “당신들은 살인자의 아들로도 모자라서 겁쟁이를 왕으로 모시고 있어? 정당한 권리의 요구도 거부하고 버틸 만큼 겁을 먹은 저런 한심한 놈을? 저게 너희들의 수호자야? 저게 너희들의 왕이야?”

  빈정거리며 뱉어낸 도발의 말들은 얼핏 아무렇게나 던져대는 것 같았지만, 기실은 잘 벼려진 칼날의 효율적인 조합이었다. 그렇게 만들어 낸 치명적인 무기로 에릭 킬몽거는 트찰라를 상처 입히지는 못했으나 다른 사람을 예리하게 찔러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트찰라는 와카비의 얼굴에 떠오른, 저를 향한 불신의 감정을 읽었다. 클로를 놓쳤다는 말을 들었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눈빛이다. 납덩이처럼 가라앉은 시선. 그것으로 와카비는 말하고 있었다. 너는 정말 그것밖에 안 되는 왕이야? 그럴 바엔 차라리 왕좌를 넘겨, 라고.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가 보이고 있는 명백한 불신과 실망. 그것을 마주하자 일순 마음이 엉크러지고 만다. 그러나 트찰라는 목울대까지 울컥 치민 뜨거운 것을 눌러 참았다. 휩쓸려선 안 되었다. 무엇이 자신을 삼키려 드는지, 그는 똑똑히 보고 경계해야만 했다.

  “그를 풀어줘, 와카비.”

  뜻밖의 지시에 에릭과 와카비가 모두 의아하게 트찰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와카비는 에릭의 묶인 손을 풀어냈고, 에릭은 마치 결투를 앞두고 몸의 상태를 점검하듯 대놓고 손목을 이리저리 꺾어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트찰라는 차분히 짚어 말했다.

  “한국에서 내가 잡았던 클로를 네가 빼돌렸던 건, 이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지. 나는 클로를 잡았지만 너는 그러지 못했다, 라고.”

  에릭이 허를 찔린 듯 침묵했다. ‘클로를 빼돌렸다’는 말에 원로들이 멈칫하고는 무슨 뜻이냐는 듯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트찰라는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도 와카비가 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시 한 번 풀어 말했다.

  “클로에게 죽은 사람들의 원한을 푸는 건 나 역시도 간절히 바란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보더 부족의 소망이었다. 그걸 노렸던 거냐? 내가 그들의 숙원을 이뤄주는 걸 방해하고, 나 대신 클로를 넘겨줘서 신뢰를 가로챌 셈이었나? 그러려고 한국에서 내가 잡아 가두었던 클로를 빼돌려갔던 거냐고 묻는 거다. 네 목적이, 와칸다에 분열을 일으켜서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거였는지, 그걸 묻고 있어.”

  에릭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을 가늠하듯 눈썹을 치켜 올린 그는 입을 다문 채로 트찰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섣부른 부정으로 덜미를 더 내주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 자체가 또 다른 대답이다. 트찰라는 에릭의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CIA가 몇 가지 취조만 끝내면 클로를 와칸다로 데려올 참이었다. 하지만 네가 끼어들어 클로를 빼갔어. 그때 네가 쏘아댄 총에 나키아가 다칠 뻔했다. 총알을 대신 맞은 미국인 덕분에 다행히 무사했지. 나키아를 구한 그 미국인은 여기서 치료를 받고 있고.”

  그 말엔 리버 부족의 족장이 에릭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트찰라를 돌아보았다.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야말로 유유한 강물 같던 그의 눈이 미처 갈무리하지 못하고 옅게 떠올려 버린 감정. 분노였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트찰라는 아차, 후회했다. 혈육을 아끼는 리버 부족의 족장이 있는 자리에서 나키아의 이름을 섣부르게 꺼낼 것이 아니었는데.

  말해놓고 보니 모두에게 에릭을 물어뜯으라고 부추기는 모양새라 트찰라의 마음 귀퉁이가 불편하게 우그러진다. 하지만 에버렛 로스가 에릭에 관해 트찰라에게 가르쳐 주었던 사실들을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었고, 그러자면 로스가 와칸다에 있는 이유를 먼저 짚어야만 했다. 외부인을 들인 일에 대해선 원로들에게 미리 충분히 말해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네가 클로의 부하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아버지의 것과 똑같은 반지를 목에 걸고 있었지……. 나키아를 구해준 미국인이 CIA요원이라 너를 알고 있더군. 너는 미국 특수부대를 거치면서 그동안 수많은 국가와 정부를 전복시키고 요인들을 암살해 왔다지. 일부러 클로를 빼돌려서 직접 끌고 온 것도 그럴 때 쓴 수법들 중 하나였나? 정부를 장악할 세력을 만들 때의?”

  이어지는 추궁에도 에릭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디 더 해보라는 듯 빤히 바라봐오며 눈썹만 치켜 올릴 뿐. 할 말은 많지만 네가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식의 태도에 트찰라는 미간을 모았다. 죄를 인정한 자의 자세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기회를 노리며 수풀 속에 웅크린 맹수의 그것에 가깝다.

  트찰라는 에릭의 당당함에 미약한 불안을 느꼈으나 곧 흐트러지려는 자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선언하듯 말을 이었다.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그 틈새를 파고드는 너의 방식은 지도자의 것이 아니다. 수호자의 것도 아니야. 침략자의 것이지. 그런 네가 와칸다의 왕좌에 도전하는 것을, 나는 거절하겠다. 너는 우리의 왕이 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작은 선물이었어. 확대 해석하지 말지, 사촌? 내 인상이 네가 말했다시피 이 모양이라서 평소에도 선물 없으면 대번에 문전 박대란 말야.”

  어깨를 으쓱한 에릭이 턱을 치켜들고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트찰라는 그에 뭐라 반박하려 했으나 그보다 에릭이 말을 가로채는 것이 더 빨랐다.

  “클로와 같이 일한 건 사실이야. 놈을 잡으려고 접근하자면 그 방법뿐이었거든. 하지만 한국에 네가 있었던 줄은 몰랐어. CIA가 클로를 잡은 줄 알았었지. 거기서 놈을 빼낸 건 내 손으로 처단하기 위해서였고. 와칸다는 그동안 30년 가까이 클로를 내버려 뒀는데, 그러면 클로를 잡는 게 통 어렵거나 아예 포기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잖아? 그래서 내가 잡았어. 그대로 활개 치는 꼴을 도저히 보고 싶지 않아서! 헌데 그걸 이렇게 꼬투리 잡을 줄은 몰랐네.”

  전혀 물러설 기세가 없는 맹수의 눈으로 노려보며 에릭이 말했다. 바위처럼 굳건히 다잡았던 트찰라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은자다카가 지금 한 말이 사실일까? 내가 그의 의도를 곡해했던 것일까? 무수한 사람을 살해하고 국가를 전복시켰다는 킬몽거의 악명부터 먼저 경계하느라, 그가 나의 사촌이자 혈육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의문에 트찰라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보아하니 나를 외부인에다 침략자로 몰아서 내쫓는 게 목적인 모양인데, 아주 잘 하고 계시긴 하지만 비열한 방식이지. 지금 누가 더 더러운 꼴인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름을 물어보라는 내 말에 너는 뭐라고 했었지? 분명 조금 전까지 너는 내 신분을 묻어버리려 했어. 네 아버지가 죽인 내 아버지 은조부와, 그 아들인 나의 존재 자체를!”

  이번의 칼날은 트찰라를 분명히 꿰뚫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에릭 스티븐스는 미국인 용병, 외부인일 뿐이라 슈리가 외쳤을 때, 트찰라는 그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었다. 자신이 누군지 물어보라던 에릭의 요구도 트찰라는 거절했었다. 그가 은조부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에 대한 두려움이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때문이다.

  트찰라는 아직 아버지의 과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계속 묻어둘 것인지 아니면 모두에게 밝힐 것인지조차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순간이 성큼걸음으로 다가오니 맞서지 못하고 허우적대며 도망쳤다. 공포는 복수심만큼이나 사람의 눈을 흐린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휘둘렸다. 그 결과가 이 꼴이다.

  “미안하다…….”

  신음처럼 흘러나온 사과의 말에 에릭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미안하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평정심을 잃었어.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네 신분이 밝혀졌을 때 받아들여야 할 사실들을…… 지금은 피하고만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미안하다.”

  그렇게 다시금 사과하며 시선을 내리까는 트찰라를, 에릭은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 역시도 잠시간 말이 없으니 사방이 침묵에 잠겨든다. 트찰라와 에릭의 대치를 내내 숨죽이고 지켜보기만 하던 슈리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오빠. 방금 그게 다…… 정말이야? 저 사람이 정말 우리 사촌이고…… 아버지가…… 삼촌을 죽였다고? 오빠는 알고 있었어?”

  평소처럼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동생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드러난 행적에 받은 충격이 역력하다. 얼마 전의 트찰라 본인도 그러했었다. 트찰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몰랐다고? 정말 몰랐다고?

  에릭 스티븐스―은자다카는 주먹을 꾹 쥐었다가 간신히 풀어냈다. 당장 트찰라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묻고 싶었다. 그 긴 세월 동안, 버려진 내가 있었단 사실을 몰랐다고? 정말로? 세계 각지에 워독을 박아놓고 정보를 수집하는 와칸다의 왕이?

  몰랐을 리가 없다. 놈의 아버지가 한 일을, 그 더러운 왕좌를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면서 놈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 증거로, 놈은 에릭의 앞에서 다짜고짜 입단속부터 시켰다. 클로를 잡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살려두고 있는 거라며, 태연하게 협박까지 했던 놈이다.

  능구렁이 같은 새끼. 남의 머리 위에 올라앉은 놈들은 하나같이 똑같지. 에릭은 이를 갈았다.

 오랜 특수부대 생활과 용병 생활 중에 겪어 온 수많은 경험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기득권이란 놈들은 항상 똑같았다. 재산과 안위만 지켜지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안전한 곳에서 한 발짝도 나올 생각이 없는 돼지새끼들. 자기들이 틀어박힌 든든한 벽 바깥세상의 괴로움은 포르노처럼 소비하고,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이용할 뿐인 작자들이다.

  차라리 조용히 틀어박혀있기만 하면 다행이지. 손아귀의 것들을 계속 쥐고 있기 위해 온갖 더러운 짓을 마다하지 않는 족속들 아닌가. 안락한 와칸다의 왕좌에 앉아 권력을 움켜쥔 저 새끼도 마찬가지다. 사슴처럼 선량한 눈깔을 하고는 뱀처럼 교활하게…… 구역질이 치밀었다.

  아니. 여기서 내가 감정적이 되어버려서야 어쩌나.

  에릭은 호흡을 고르며 스스로를 눌러 다잡았다.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스스로를 예리하게 집중시키고, 생사를 건 전장에 임할 때의 감각을 되새긴다. 감정이 흔들린 놈, 망설이는 놈, 방심한 놈들이 항상 먼저 뒈지기 마련이었다.

  지금도, 누가 먼저 흥분하고 감정적으로 움직이느냐의 게임이다. 트찰라를 도발하되, 놈의 도발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놈도 그걸 알고 있는 듯하니 쉬운 게임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틈은 찾아야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때를 놓칠 수야 있는가.

  그렇게 자신을 다잡으면서, 에릭은 동생을 달래고 있는 트찰라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냉정히 응시했다.

  “슈리. 울지 마.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리가 말해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한 놈이 원로들을 돌아보았다.

  “주리를 부르겠습니다. 그의 설명이 여기 있는 원로 여러분께도 필요할 테니. ……너도, 원한다면.”

  트찰라의 지시에 누군가가 의자를 가져와 자리에 놓았으나 에릭은 흘끗 쳐다보기만 하고 도라 밀라제들이 지키고 있는 벽 쪽 기둥으로 물러나 섰다. 왕좌를 앞에 두고 부족 의회장의 의자에 하하 호호 둘러앉을 기분 따위가 아니었다.

  팔짱을 낀 채로 기둥에 등을 기대며 에릭은 생각했다.

  뭐라고 지껄이는지 일단은 들어 보자고. 틈을 찾는 게 우선이니까.

  기껏 클로를 넘겨줘서 얻어냈던 보더 부족의 환심은 저 자식이 박살을 내어 놨으니 혼자 감행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좁았다. 어쨌든 일대일 결투로 끌어내어야 그나마 가망이 있겠는데, 귀신같이 눈치를 챘는지 도전을 받지 않겠다고 버티는 중이니…….

  겁쟁이라고 압박해서 결투로 끌어내기도 여의찮다. 도발에 말려들기는커녕 차분히 분쇄해 내는 게, 보통내기는 분명 아니었다.

  저 자식을 어떻게 왕좌에서 끌어내린다……?

  여러 방향으로 뻗치는 생각을 정리하며 에릭은 잠자코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트찰라가 말한 주리라는 작자가 부족 의회장에 도착했다. 치렁하게 늘어뜨린 복장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모습이 꼭 제사장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팔짱을 끼고 그걸 관찰하던 에릭은 낯익은 얼굴이 하나 그 위로 어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낯익은 얼굴. 그러니까……. 잠시 기억의 서랍을 뒤져 온갖 잡동사니를 끄집어낸 에릭은 드디어 들어맞는 퍼즐의 조각을 찾아냈다.

  제임스 삼촌. 와칸다 사람이었어? 왜 여기에 있어?

  밀려드는 황당함. 뒤를 잇는 것은 배신감이다. 아버지를 그림자처럼 따르고 저를 챙겨주었던 제임스 삼촌이 대체 왜 여기에.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냔 말이다. 말도 없이 사라진 사람이, 20년도 더 전에 나를 버리고 떠난 사람이.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람이 왜 여기에 있냐고.

  다물어지지 않는 입으로 에릭은 제임스 삼촌을 쳐다보기만 했다. 트찰라가 뭐라고 말하는 것을 경청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제임스 삼촌의 모습이 현실감이 없었다. 무언가 결심을 굳히는 것처럼 좌중을 한번 돌아보던 그가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에릭을 발견한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조금 커지는 눈. 그도 저를 알아본 것이 분명한데, 곧 말없이 눈을 피한다. 이어 그는 천천히 입을 열어 미국에서 은조부와 함께 지냈던 사연부터 풀어놓기 시작했다.

  냉정해져라. 흥분하지 마.

  마치 제3자의 일을 들을 때처럼 에릭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자신과 분리시켰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새삼 아버지의 죽음에 동요할 이유가 없다. 그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사람이 저를 버린 제임스 삼촌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감정을 동결시킨 채로 에릭은 주리의 증언이 판세를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만 주시했다. 곧 주리의 이야기는 20년도 더 전의 그날 밤에 트차카가 은조부를 찾아왔던 목적을 풀어놓기에까지 이르렀다. 듣고 있던 에릭은 낭패감에 미간을 찡그렸다.

  율리시스 클로가 비브라늄을 빼돌리면서 폭탄을 터뜨렸고 그로 인해 보더 부족의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것은 그도 이미 파악해 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때 내부자로서 클로를 도운 죄가 은조부에게 있었다는 내용은, 에릭에겐 금시초문이었다.

  주리의 증언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이 이야기가 신뢰하는 제사장의 입으로 원로들에게 공개되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의미심장하다. 이러면 보더 부족이 율리시스 클로에게 품은 원한이 에릭 자신에게도 일부분 넘어온다. 희생자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클로와 은조부가 나누어 짊어졌으니, 은조부의 아들인 에릭이 접근해 왔던 것을 보더 부족은 기만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클로의 시체를 가져와 환심을 사려 했던 자가 사실은 클로에게 동조한 죄인의 아들……. 모양새가 좋지 않다. 더구나 트찰라는 한국에서 클로를 빼돌렸던 자신의 행동을 이미 지적했다. 뭐라고 했더라. 그래. 클로의 부하인 줄 알았다고. 아주 탁월한 워딩이었다. 방어할 말을 찾느라 진땀을 뺄 만큼. 나키아라는 여자를 공격했다는 지적도 마찬가지였지.

  과연 저 자식도 그냥 왕좌를 꿰찬 건 아닌 모양이지. 선동에 재주가 있다. 이제 보니 하나하나가 교묘하게 깔아둔 덫이었다. 자신은 거기에 말려들고 있는 중이고. 에릭은 새삼 이를 갈았다.

  어쨌든 판이 트찰라에게로 기울어 버린 것은 분명하다. 사전에 말을 맞춰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판의 짜임이 교묘했고, 지금의 형세에서 에릭이 판을 뒤집을 가망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어떡할 것인가? 조용히 꼬리 내리고 터덜터덜 물러나야 하나? 그러려고 여기까지 왔던가? 그럴 리가. 어떻게든 일대일 결투로 끌어내야 한다. 다행히 그가 무기로 삼을 것이 아직 하나 있었다. 왕위 계승자에게 도전할, 왕족으로서의 권리.

  주리가 긴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동안, 에릭은 그물처럼 치밀한 말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짜 맞추었다. 겁쟁이라는 도발을 태연스레 넘겼던 트찰라도 이건 피해낼 수 없을 것이다.

  내 혈관에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너는 내가 왕위에 도전하는 것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내 도전을 거부하는 것은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으니까. 나는 그 사실을 들개마냥 물고 늘어질 것이다. 에릭은 계획을 신조처럼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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