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가 : 페이지 74p (정말)최종. 가격은 8000입니다.



* 6월 24일 디페스타 쩜오어워드

* 부스 위치 V9b

* 책 사양 : 국판 66p 최종 73p 74p

* 가격 : 7000 최종 8000

* 문의 : 트위터 @jingyanlinshu 로 DM 주세요.



* 행사 당일 현장판매만 합니다.

* 판매 전에 성인 여부 확인합니다. 신분증을 보여주세요.

* 재고가 남으면 통판을 진행할 수도 있지만 안 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귀차니즘...)

* 통판 진행시에는 새 인포를 올립니다.



* 내용 :

총 6개 챕터로 구성

아래 발췌 내용을 참고해주세요. (1~2 챕터)

발췌분은 원고를 최종적으로 넘기기 전에 수정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발췌분에서 크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1. 순흔脣痕


  잔기침을 쿨럭쿨럭 뱉는 목덜미에 찍힌 그것은,
  순흔 – 입술자국이었다.
  그 순흔이 정왕 소경염의 눈에 띈 것은 그야말로 우연.
  매장소가 슬쩍 몸을 기울이는 짧은 찰나 드러난 살갗에 경염의 시선이 닿을 수 있었던 것도 공교로울 뿐이다. 경염의 책사 – 강좌맹 종주 매장소는 한기를 유독 견디지 못해 여름의 초입에도 옷깃을 턱밑까지 단속하는 인사가 아니던가.
  옷깃 속으로 금방 사라져 잠깐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건 분명히 입술이 닿은 흔적이었다. 울긋한 목덜미에 잇자국까지 남았거늘 어찌 벌레의 소행일 수 있으랴.
  누굴까.
  저도 모르는 사이 경염은 입술의 주인이었음직한 인사들을 하나씩 꼽아 보았다. 불청객처럼 불쑥불쑥 떠오르는 얼굴들이 두서가 없었다. 기억 속 얼굴들과 매장소의 평소 사이가 어떠했는지 짚어보는 시간이 길었다.

  정왕의 갑작스러운 침묵을 이상타 생각 못할 매장소가 아니다. 굳이 특출한 예기가 필요치도 않은 일이었다. 지금의 경염처럼, 머릿속 생각을 감추더라도 눈으로는 옷깃 속 목덜미만 지긋이 바라보면 누군들 기색을 눈치챌 밖에.
  “무엇을 그리 보십니까.”
  서책을 뒤적이며 묻는 목소리가 태연하다. 이쪽엔 눈길도 주지 않는 모양새는 차라리 무심에 가까웠다.
지금 매장소는 자신이 경염에게 무엇을 내보였는지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혹은, 누군가의 입술을 탔음이 분명한 그 목덜미는 애초에 정왕에게든 누구에게든 아무 때나 내보여도 상관없는 것이었거나.
  경염은 방금의 순흔을 못 본 척할지 아주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시침을 떼고 눙치는 것은 확실히 그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 그는 흠, 마른기침을 삼켜 목을 가다듬었다.
  “목덜미가 잠깐 보였소.”
  말을 꺼내자 건너편에서 서책을 넘기던 손길이 일순 멈칫한다. 미묘하고 작은 변화였으나 매장소가 경염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것만은 분명했다. 경염은 어쩐지 낯이 확 달아오르고 말아, 서둘러 덧붙였다.
  “정인의 흔적이라면 실례했소.”
  “……예왕입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단조롭다 못해 심드렁하다. 덕분에 경염은 ‘예왕’이 바로 그 예왕 소경환, 경염의 배다른 형을 지칭한 것임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뒤통수를 맞기라도 한 듯 얼떨떨한 경염을 향해 매장소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오해하실까봐 덧붙입니다만, 저의 정인이 예왕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경염은 다시 멈칫했다. 이번엔 다른 이유에서.
  오해를 걱정해 부연한다는 매장소의 태도와 목소리는, 그러나 실상 경염이 뭐라 생각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무감하기 그지없다. 흐트러짐 없는 태연자약함이 여전한데, 뿐 만인가. 보란 듯 찍힌 순흔을 굳이 공들여 해명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예왕 소경환이 입술자국을 목덜미에 새겼다는 말을 하면서도, 흐르는 물처럼 유유하고 막힘이 없는 걸 보면.
  “그럼 예왕과 정인은 아니지만 몸은 나누는 사이란 거요?”
  묻는 소리가 힐난에 가까워진 것은 그 탓이다.
  말을 뱉고서야 경염은 저의 목울대부터 시작해서 턱밑까지 번져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다. 화기(火氣)를 닮은 감정. 미약하게 퍼지기 시작한 그것은 분노에 가까웠으나 경염 자신도 그 정체를 분명히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매장소가 경염을 흘끗 바라보고는 서책을 내려놓았다. 매무새를 정돈하더니 담담히 설명을 시작한다. 내용은 간단하고도 명료했다. 매장소 자신에게는 ‘기질’이 있어 대량(大梁)의 황실 소씨의 피를 진정시킨다는 것이었다.
  ‘기질.’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경염은 매장소가 예왕과 몸을 섞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더불어 무엇을 노리고 예왕과의 사이에 육체관계를 끌어들였는지까지도.

  대량(大梁)의 황실 소씨의 피는 특정한 때에 전신을 휘도는 독과도 같은 것이 된다. 본인도 통제할 수 없을 만치 감정이 요동칠 때, 특히 초조, 분노, 불안, 슬픔 같은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였을 때에 그렇다. 보통 사람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면 흘려보낼 수 있을 감정들이, 소씨의 기혈 속에서는 아주 위험한 기운이 되어 스스로를 해치기 때문이다.
  그 부정적이고 날카로운 감정들은 소씨의 혈관 속에 한번 자리 잡은 다음에는 자연적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뭇 필부들처럼 털어내고 삭여낸 듯 보이나, 겉으로만 그러할 뿐이다. 사실은 변질된 감정이 독(毒)으로 혈관을 흘러 기맥을 흐트러뜨리는 중인 것.
  피와 기맥에 쌓인 이 독을 오래 두었다간 심신 모두에 영향을 미치고 광증을 부른다. 광증에 이지(理智)를 빼앗기면 두 달 내로 반드시 죽음에 이르니, 이러한 피의 성질을 따로 지칭할 말이 없어, 황실에서는 그저 그것을 소씨지독(蕭氏之毒), 혹은 심독(心毒)이라 불렀다.
  소씨의 심독은 발현하자마자 목숨을 앗아가는 종류의 맹독은 아니다. 그러나 서서히 육신과 정신을 갉아먹으니 쌓이면 쌓일수록 위험했다. 소씨의 피를 타고난 자들은 모두 크건 작건 이 심독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이하게도 여성보다는 남성이 그 정도가 심했다. 또 어린아이보다는 약관을 넘긴 성인이, 방계보다는 직계 황손일수록 심독에 취약했다.
  따라서 소씨 황실은 정기적으로 직계의 성인 남성 – 황제와 황자들 – 의 심신을 정화하여 기맥 속의 소씨지독을 몰아내어 왔다. 그 정화의 방법이란 심신의 기를 동화시키는 것이었는데, 육체와 육체가 가볍게 접촉하는 것으로도 가능하지만 점막을 접촉할수록 – 특히 몸을 섞는 것이 가장 확실한데다 효과도 컸다. 허나 소씨의 피가 아무하고나 동화하지는 않아서, 황실은 소씨의 피와 동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기질(起質)’이라 이름붙이고 그 능력을 타고난 자를 ‘기질지재(起質之才)’, 혹은 ‘기질재자(起質재才子)’라 부르며 특별히 찾아 구하고는 했다.

  매장소는 예사롭게 덧붙였다.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심독을 정화하는 방법은 ‘기질’ 있는 자와의 접촉이지요. 저는 그 ‘기질’이 특히 강하고 독특합니다. 예왕은 과연 그래서 기린지재인가, 하고 웃더군요.”
  예왕도 기꺼웠을 수밖에. 기질재자는 매우 귀하다. 황실이 소씨 혈족을 위해 양나라 전역을 수시로 뒤져서도 찾아낼 수 있었던 게 겨우 셋 뿐. 그 중 둘이 남자요 하나가 여자인데, 공교롭게도 성별이 같은 상대에게만 기질이 작용하기에, 수가 더더욱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귀한 기질재자 중 숨어 있던 한 명이라. 매장소와 몸을 섞으면서 예왕 소경환은 많은 것이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금릉을 떠들썩하게 만든 기린 소철― 태자와 친왕 사이에서 감히 저울질을 할 정도의 인재를 제가 얻었다고 생각중일 예왕이었다. 탁월한 책략의 모사이자 무림 제1 무력의 상징인 강좌맹 종주를 제 오른편에 거두었으니 승리감이 지극한 것은 당연한데 거기에다 기질재자와 몸을 섞음으로써 특출한 정화의 효과까지 누렸다면 그 만족감을 필설로 어찌 다 형용할까.
  그러나,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소?”
  경염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예왕이 먼저 매장소의 기질을 알아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방금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 경염조차도 그의 ‘기질’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으므로. 매장소가 먼저 드러내지 않았다면 예왕인들 어찌 그것을 알았으랴. 즉, 경염의 물음은 예왕에게 몸을 내어주는 짓까지 해야만 했느냐는 비난에 다름 아니었다.
  표면 아래에 담긴 뜻을 읽지 못했을 매장소가 아니다. 그가 입매를 빙긋이 끌어올렸다.
  “예왕부에 책사는 이미 많습니다. 제가 비록 백리기의 일로 폐하의 어전에서도 저의 책략을 입증해 보였으나, 본시 공이란 잊히고 과만이 남는 법입니다. 백리기의 일도 금방 잊힐 것이 불 보듯 뻔할 터, 기린지재는 태자와 예왕 사이를 감히 저울질하는 자인데 보통의 책사이기만 해서는 안 되지요.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어렵게 얻을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담담하고 흔들림이 없는 달변이다. 경염은 잠시 매장소를 빤히 바라보았다. 맹금처럼 쏘아보는 눈길이 강렬했다. 허나 매장소는 조금도 위축됨이 없었다. 경염을 마주 보는 얼굴의 빙긋이 올린 양쪽 입꼬리가 내려갈 줄 모른 채 가면 같은 웃음을 지어내고 있었다. 경염은 그것이 매우 불쾌했다.
  말은 번드르르하게 둘러대었으나 결국 몸을 미끼로 내놓은 것과 무엇이 다른가. 동화의 기질까지는 굳이 예왕에게 알리지 않았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매장소의 ‘기질’에 관해서는 전혀 모른 채로도 예왕과 태자는 이 강좌의 기린을 먼저 얻겠다고 동분서주했었다. 그런 태자와 예왕의 하는 양을 마치 손바닥 위 꼭두각시놀음처럼 즐기다가 예왕을 선택한 척, 매장소는 몰래 속삭이는 비밀처럼 ‘기질’을 털어놓았겠지.
  갑자기 매장소와 동석한 자리가 더는 못 견딜 끔찍한 무언가처럼 여겨져서, 경염은 예를 차리는 것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음을 떼놓는 그의 뒤로 여전히 태연한 매장소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전하께서도 필요하실 때 말씀하십시오. 제 기질은 속박되지 않아 누구와도 동화합니다. 그야말로 ‘기린의 기질’이지요.”
  어조는 평이하다 못해 심드렁하기까지 하나 내용은 명백한 도발이다. 얼핏 조롱을 던져온 것처럼도 들렸다. 경염은 잠깐 멈칫했으나 돌아보지도,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소택의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그는 치솟는 분기를 눌렀다. 그리고 다짐했다. 만에 하나 소씨지독이 전신의 혈맥을 뒤엎어 놓더라도, 절대로 예왕처럼 매장소의 힘을 빌릴 일은 없으리라고.
  동시에 그는 역시 소씨의 피가 흐르는 제 그리운 친우를 생각했다.
  임수라 해도 매장소 같이 속내 음흉한 자와 기를 동화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의 자리에 임수가 동석했다면, 그는 어찌했을까. 아마 웃으며 경염의 어깨를 툭 치고는 놀리듯 말했겠지. 임수 자신이 본디 낙천적이고 대범하여 심독에 기혈을 해쳐 본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고. 저 매장소 같은 이에게 손을 벌리고 빚을 질 까닭이 없으니 하늘이 내린 복이 아니겠느냐고.
  상상하자 임수의 웃음소리가 몹시 그리웠다.
  경염은 어느새 자신이 걸음도 멈추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손을 들어 미미하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꾹 한번 누르고는 말없이 걸음을 떼놓았다.
  임수를 이제는 돌이킬 길도 없이 떠나버린 추억의 한 조각처럼 여길 까닭이 없었다. 그의 친우는 분명히 살아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

  ― 전하께서도 필요하실 때 말씀하십시오. 제 기질은 속박되지 않아 누구와도 쉽게 동화합니다. 그야말로 ‘기린의 기질’이지요.

  매장소의 그 말을 경염은 다시 곱씹었다. 시간이 지나 거세게 타올랐던 분노가 가라앉은 탓일까, 불길에 억눌려 있었던 또 다른 감정들이 이제 경염의 명치께를 장악하며 점차 덩치를 키워가는 중이다. 의문, 그리고 미묘한 죄책감이.
  필요할 때 말하라는 둥, 누구와도 쉽게 동화한다는 둥, 매장소가 경염에게 태연히 던져왔던 표현들은 여전히 신경에 거슬렸다. 곱씹을수록 불쾌했다. 속된 말로 언제든 대줄 테니 말만 하라는 것 아닌가. 그따위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태도만큼은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어조 역시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으며…… 그랬기에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의 자신이 이상할 정도로.
  매장소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것일까. 그도 당시에 경염의 기분이 이미 파지의 뭉치처럼 형편없이 우그러졌음을 능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매장소는 소택을 떠나려는 경염의 등에다 대고 기어이 빈정거렸다. 마치 최후의 쐐기를 박아 넣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듯. 평소의 매장소에 비추어 생각하면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아니, 이상하기로는 매장소의 언행을 아직까지 곱씹는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의 행동에서 이유를 캐려고 자꾸만 열중이었다.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만드는가. 왜 스스로 불쾌감을 되살리고 마는가. 까닭을 알 수 없어도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매장소의 행동에 이유를 붙여주려고 머리 한 구석이 열심인데, 스스로도 영문 모를 노릇이다.
  경염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열전영도 내보낸 정왕부의 서재에는 경염 한 사람뿐이라, 그가 만들어 내고 있는 긴 침묵이 오랫동안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군.’
  한동안 생각하던 경염은 먼저 매장소를 도발한 쪽이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까지 해야 했느냐는 물음. 그게 시작이었지. 눈살을 찌푸리고 물음을 던지며, 비난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었다. 경염 자신이 은연중 경멸을 보였으니 매장소 역시 그 미세한 공기를 느낀 것이다.
  정생을 액유정에서 빼낸 책략을 인정하고 책사로 삼으면서, 매장소의 방법이 내키지는 않아도 신뢰하겠다 했었는데. 예왕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느냐’고 물음으로써 경염 저 자신부터 매장소를 은연중 창부의 위치로 끌어내렸다. 그러니 매장소도 언제든 필요하면 말하라 받아쳐서, 경염을 같은 위치의 진탕으로 똑같이 끌어내릴 밖에. 그리고 저는 그것에 다시 분노한 것이다.
  결국 그런 것이었다.
  서로 한 번씩 주고받은 것이로군. 경염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의 기분을 형언하기 어려웠다. 서로가 서로의 무엇을 겨냥했었는지를 알아차리고 나니, 오히려 다음 번 매장소를 만났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지고 말았다.
  경염은 아직도 매장소가 예왕을 속이고자 취한 방법이 지나쳤단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예왕에게 몸을 내주었을 매장소가 불쾌했다. 목덜미에 남은 그 흔적은 단순히 몸을 섞은 것이 아니라, 연정을 주고받는 연인처럼 뒤엉켜 서로를 애무했다는 증거다. 그것이 화가 났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어찌. 사람의 허점을 포착하면 그것을 집요하게 물어 뒤흔들며 이용하는 자인 줄은 알았지만 어찌.
  “…….”
  경염은 탐탁찮은 얼굴로 서재를 정리했다.
  매장소가 예왕을 어찌했든 간에 저가 먼저 시비를 붙인 것은 분명하다. 다음에 매장소를 보거든 지난번에는 내가 말이 지나쳤다, 한 마디 정도는 먼저 짚어 사과하는 편이 좋을 것인가. 상상해본들 내키는 광경은 아니라, 경염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의외로 먼저 사과의 말을 꺼낸 것은 매장소였다. 며칠 뒤 경염이 다시 소택을 찾았을 때였다.

  “지난번은 말이 지나쳤습니다. 전하께선 용서하십시오.”

  매장소는 경염을 보자마자 두 손을 맞잡아 예를 취하고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덕분에 경염은 좀 이상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말이 지나쳤다고. 저 인사가 방금 그렇게 말한 것인가.
  경염은 제 앞에 허리를 숙인 채로 답을 기다리는 매장소를 가만히 보았다. 기분이 몹시 묘했다. 매장소 역시 그때의 일을 지금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가. 저 냉혈한, 차가운 피의 모사꾼이 경염과 똑같은 고민의 시간을 보냈단 말인가? 말이 지나쳤다는 표현마저 경염이 사과의 말로 골라 보았던 것과 같았다.
  그는 조금 얼떨떨한 속내를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그때는 좀 지나쳤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서로 간에 새삼스러운 말은 그만둡시다.”
  먼저 자리에 앉자 매장소가 경염의 바른편에 앉는다. 그를 보자니 거울에 비춘 것도 아닌데 지난 며칠간의 자신이 생각났다. 비아냥을 던지던 매장소의 속마음을 혼자 이리저리 추측해 보면서 혼자 화를 냈던 자신이. 곱씹을수록 괜한 분노만 피워 올리고, 그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심독을 쌓아갈 뿐임을 알면서도 도저히 생각을 접지 못했었다.
  매장소 역시 마찬가지였을까. 경염에게 던졌던 마지막 말을 그도 계속 곱씹었던 것일까. 그러다 며칠 전 경염이 심중의 변화를 겪은 것처럼, 매장소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일까. 그 탓으로 오늘 얼굴을 보자마자 지나간 일의 사과부터 한 것일까.
  머릿속이 멋대로 흐르고 있는데 매장소가 말을 붙였다.
  “잠깐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전하.”
  소매를 걷으며 손을 내민다. 그것이 심독을 해독하는 기질재자들과 같은 동작이라 경염은 책사가 청하는 바를 어렵잖게 알아차렸다.
  “나는 심독이 많이 쌓이는 체질이 아니오. 정화는 필요 없소.”
  “지금까지는 그러셨겠지요. 앞으로는 다를 겁니다. 변방의 군영에서 뜻 맞는 부하들과 함께 지내던 생활이 정쟁 한가운데의 것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예전에 계셨던 군영이 어떤 험지라 한들, 독사의 혀로 가득한 어전과 금릉보다는 평온했다고 생각하게 되실 겁니다.”
  “…….”
  잠깐 매장소를 바라보던 경염은 내민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살갗과 살갗이 맞닿았고, 바로 동화(同化)가 일었다.
  청량한 바람이 혈관 속을 흘렀다. 전신의 혈맥을 휩쓸고 흐르는 기운. 내어준 손목에서부터 시작된 그것이 어깨를 지나 등허리를 타고 오르더니 순식간에 발끝까지 퍼져나갔다. 전신이 온통 사로잡혔다가 풀려난다. 한 호흡 들숨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느꼈다. 마치 억겁의 시간 같았으나 아마 찰나였으리라.
  그리고는, 밀려난 자리의 공백을 채우듯 다시 일상이 돌아왔다.
  가슴께에, 아니 마음에 묵직하게 얹혀 있던 무언가가 사라져 있었다. 사라지고 나서야 경염은 그것에 자신이 눌려 있었음을 깨닫는다. 찌뿌듯했던 마음이 비로소 개운하다. 그 효과에 경염은 깜짝 놀랐다. 이게 심독을 정화한 것이라고? 황실의 기질재자가 해 주었던 동화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무엇이었다. 거기다 지금껏 접했던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청량한 기운. 음험하고 속내 모를 책사가 그 속에 품고 있을 기운이라고는 도통 믿기지 않는다. 오히려 뜻이 높고 고아한 선비의 그것에 더 가깝게만 느껴지니 경염은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그때까지 잡고 있던 손을 매장소가 비로소 놓았다. 경염은 새삼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는 매장소를 돌아보았다.
  “쌓였던 심독은 털어냈습니다. 가끔 이렇게 해드리겠습니다. 황실의 기질재자를 열 번 불러 봐도 이만하기는 어려울 터, 같은 시간이면 제가 가끔 한 번씩 해드리는 편이 훨씬 나을 겁니다.”
  말하는 얼굴은 평연하다. 내용은 거만한 구석이 없지 않지만.
  그래. 이런 식으로 말하는 자였지. 경염은 또다시 새삼스러웠다. 자만과 오만의 두 영역 어느 한 쪽에도 모자람 없이 고루 갖춘 말을 당연하다는 어조로 꺼내면서, 낯부끄러워하기는커녕 겸양의 기색조차 없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기와 동화한 순간은 분명 경이 그 자체였으니.
  경염은 매장소의 책략에 그랬던 것처럼, ‘기질’에도 순순히 감탄하기로 했다. 과연 예왕이 찬탄할 법한 다방면의 기린이다. 그럼 자신은 이 기린을 어찌 다룰 것인가. 애초 고삐를 잡아매고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어 올라탈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아니 그보다는 기린이 먼저 저를 찾아왔지. 그리고는 태자도 예왕도 아닌, 소경염을 택했다고 했다. 왜 저였을까.
  경염이 관찰하듯 바라보는 동안 매장소는 빙긋이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전하의 흉중에 심독이 조금 쌓인 것은 제 탓이 큰 듯하더군요. 앞으로도 비슷할 테니 심독이 쌓였다 싶으면 말씀을 주십시오.”
  ……이건 혹시 앞으로도 계속 약을 올리겠다는 선언인가. 오늘 얼굴을 보자마자 지난번은 말이 지나쳤다고 허리부터 숙여 왔던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도통 알 수 없는 인사다. 그렇게 경염은 혀를 차면서도 어쩐지 이전보다는 좀 더 매장소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2. 동화同化


  심독을 해독함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역시 동침 – 기질재자와 몸을 섞는 것이다. 하지만 양의 황실은 황손의 심독을 정화하는 기질재자들에게 그 방법을 쓰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이에는 까닭이 있다. ‘기질’ 있는 자들이 소씨지독과 동침을 하고 나면 바로 상대방에게 묶여버리는 탓이다.
  묶인다 함은 말 그대로의 뜻이라, ‘기질’은 단 한 명에게만 동화할 수 있게끔 속박되며, 결과적으로 다른 소씨지독을 해독하지 못하게 된다. 한번 묶여버린 기질은 그를 속박한 자가 사망하기 전까지는 풀리지 않으니 황실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기질재자가 귀한 존재라 하더라도 묶인 기질을 풀자고 황실의 혈손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인 것. 그러니 궁여지책으로 ‘동침’을 금해 온 것이었다.
  헌데 매장소는 자신에겐 애초에 그 ‘속박’이 없다고 밝혔다. 그의 말이 진실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왕과 몸을 섞고도 경염의 심독을 씻어냈으니. 과연 기린의 이름에 걸맞은 특출한 기질이라 할 밖에.
  바로 그 매장소가 말했다.
  “전하, 손을 주십시오.”
  자연스럽다 못해 당당하기까지 한 태도다. 방금 요구한 바를 경염이 따라줄 것이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이걸로 이제 다섯 번째의 정화던가.
  매장소의 손을 쳐다보던 경염은, 그러나 하얗고 차가운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려놓기에 앞서 잠깐 이마를 좁혔다. 당사자 앞에서 내색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선뜻 손을 내놓지 못하여 망설이고 만다. 매장소에게 기를 동화시키는 것이 불쾌한 까닭은 아니다.
  심독의 정화라는 명목으로 매장소와 기를 동화한 것이 여태까지 총 네 번. 그동안 경염이 접한 매장소의 기는 불쾌한 종류의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반가워 취하도록 청량하고 시원한 기운이라, 자꾸만 마음이 끌렸다. 매료의 근원이 세상에 따로이 존재한다면, 매장소의 기운에서 바로 그것을 걸러낼 수 있을 것이다.
  경염이 지금 망설이는 것은 매장소의 기에서 어쩌다 느껴지는 난해한 속성 때문이었다. 대체로 여름날의 폭포수처럼 청량한 그 기운은, 가끔 얼음처럼 차가운 동시에 화염에 휩싸인 것처럼 뜨거울 때가 있었다.
  아마 두 번째로 매장소와 기를 동화한 때였을 것이다. 경염은 한바탕의 청풍처럼 흐르는 기운의 사이에서 한 가닥 뜨거운 화기(火氣)를 느꼈다. 갈라진 틈새로 날름대는 독사의 혓바닥처럼 새빨간 불꽃의 환영이 언뜻 치솟았다가 사라지고 마치 시뻘겋게 녹아내린 쇳물을 덮어쓴 듯 지독한 열기가 경염을 덮쳤다. 바로 다음으로 찾아온 것이 냉기. 얇고 날카로운 수천의 칼날이 전신을 동시에 찌르고 저며 내는 듯, 가슴 써늘해지는 한기(寒氣)가 뒷덜미부터 엄습했다. 아주 짧은 순간의 일이었고 고통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잠깐의 착각인가 싶어 넘겼으나 세 번째 정화에서도 그는 만 년의 빙하 같은 단단한 한기와 천 년을 타오르는 겁화의 것 같은 열기를 동시에 느꼈다.
  네 번째 동화에서야 경염은 전신의 감각이 뒤섞이는 혼란함이 자신의 심독 때문은 아니었음을 알았다. 매장소의 육신 깊숙한 곳에서부터 두 가지 기운이 서로를 맹렬히 집어삼키려 뒤엉키며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게 바로 그가 느낀 열기와 냉기의 정체였던 것이다.
  그만 한 화기(火氣)와 한기(寒氣)를 품고 있다면 아마도 심중에 온갖 고뇌와 복잡한 감정이 들끓고 있을 터. 이쪽에 흘러들어오는 청량함만으론 알 수 없는 한 층의 깊이를 매장소는 품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갈무리를 했을 것임에도 얼핏 새어 나오고 말 정도의 치열한 어떤 것들을. 허나 매장소의 얼굴은 태연무심이라. 그날의 동화가 끝났을 때 경염은 매장소의 평온한 겉모습 탓에 또 묘하고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었다. 마치 녕국후가 몰락하기까지 경염이 곁에서 지켜본 매장소라는 인물 그 자체처럼. 녕국후의 자제 소경예와 진심을 나누는 친구처럼 어울려 놓고, 그 부친을 파멸시킬 목적으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친구를 이용하는 두 가지 면모를 목격했던 그때처럼.

  매장소의 심중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단단하고 빈틈없는 비늘의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먹이가 지척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을까? 아니면 언뜻 느꼈던 그 열기와 냉기를 뿜어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만큼 괴로워하는 한 명의 사람이 들어있는 것일까? 청량한 기운의 주인이기도 한?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오늘, 다섯 번째 동화를 앞두고 어쩐지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매장소의 기운을 이쪽의 육신에 흐르게 할 뿐만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기운을 매장소의 안으로 흘려보내면. 그럼으로써 좀 더 완전한 동화를 유도하면. 한기와 열기가 덮쳐왔을 때 그냥 스쳐 보내지 않고 기운끼리 어우러지게 하여 그대로 경염의 기도 매장소의 가슴속으로 들여보내면.
  그러면 매장소가 여태껏 내보인 적 없는 것들을 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건너다 볼 수 없던 장막 속의 얼굴을 좀 더 또렷이 보게 될 것 같아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면 매장소는 본인의 기에 언뜻 비치는 냉기와 열기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심중의 것들이 기운을 타고 새어 나오고 있음을 알았다면 이미 스스로 단속하고도 남았을 인사다. 그렇다면 경염이 느낀 것들은, 또한 예왕 역시 매장소와 몸을 겹치면서 보았을 것들인가.
  이런.
  또 예왕을 생각하고 있다. 정확히는 매장소와 예왕이 몸을 섞는 순간을. 고삐를 휘어잡지 못한 생각이 여기까지 속절없이 달려와 버렸다. 경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오.”
  경염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매장소의 손 위에 겹쳐졌다.
  맞닿은 살갗에서부터 여느 때처럼 투명하고 시원한 기가 흘러들어 왔다. 경염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흐름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기운 역시 매장소의 육신으로 흘러 들어가게끔, 자연스러운 기의 합일을 유도했다.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이 통로가 되어 경염의 혈맥을 휘돌아 흐른 기운이 매장소의 혈맥으로도 흘러갔다. 그러나 어쩐지 기의 운행이 꽤 이어지고도 매장소의 독특한 화기(火氣)와 한기(寒氣)는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매장소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아주 잠깐씩 원인 모를 열기와 냉기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럴 일은 없을 터이니 전하께서도 괘념치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까닭으로 기운을 정리하지 못했으니 전하께서는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고 말 것이 어딨겠소. 신경 쓰지 않소.”
  대꾸하며 경염은 상심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게 당황했다. 그간 몰라서 흘렸던 기운을 매장소가 단속하기 시작한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그로 인해 매장소를 조금 더 들여다 볼 기회가 사라진 것도. 허나 흉중의 아쉬움은 어찌된 연유인가. 어떻게 생각해봐도, 아쉬워할 일도 미련을 둘 일도 아닌데.
  경염은 내심 고개를 가로젓고는 매장소의 기운이 혈맥의 심독을 정화해 가는 흐름에만 집중했다. 청량한 기운을 받아들이고, 응어리진 심독을 내보낸다. 자신을 확장하고, 뒤섞는다. 피아의 경계를 흐렸다가 정왕 소경염으로 돌아온다. 그러기를 계속하던 어느 때에,
  “아,”
  별안간 경염은 매장소의 손을 뿌리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매장소가 전에 없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경염 역시 머릿속이 새하얘져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더듬거리며 변명을 짜 맞췄다.
  “정왕부에……. 급한 일이, 잊고 있었소. 급히 가봐야겠으니…… 이만 실례하겠소.”
  경염은 예도 차리는 둥 마는 둥 황급히 걸음을 옮겨 정왕부로 돌아왔다. 자신의 말을 매장소가 뭐라고 생각했을지, 급조한 핑계를 의아히 여기지나 않을지 같은 것들에는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었다.
  당혹스러울 수밖에.
  이건 도대체 무슨 반응이란 말인가.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그곳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동시에 한편으로, 경염은 아연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방금 전 속에서 치밀어 오른 난폭한 충동 때문이다. 일순간이나마 그는 강제로든 어떻게든, 성이 난 자신의 양물을 매장소의 아래에 밀어 넣고 싶다고 느꼈었다.
  매장소가 거부한다 해도 중요치 않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사지를 꽉 잡아 내리누를 것이었다. 손을 묶는다는 방법도 있으리라. 그렇게, 밀쳐낼 수도 도망칠 수도 없게 만든 다음엔, 다리를 벌리고 안에 짓쳐 들어가고 싶었다. 예왕이 아니란 까닭으로 재차 거부할 지도 모르겠으나 상관없었다. 바르작거리는 몸을 한 순간에 꿰뚫을 것이었다. 가득 채워서 기둥의 뿌리까지 잔뜩 벌려진 아래쪽 입구에 밀어붙이고는, 숨을 헐떡이는 귓가에, 언제든 필요하면 말하라 하지 않았느냐 속삭일 것이었다.
  버겁게 늘어난 채로 자신을 품은 그의 안쪽은 아마 용암처럼 뜨거우리라. 안을 들쑤시고 비비고 찔러 올리면 태연자약한 얼굴도 일그러지고 신음이 흐를 터. 젖은 신음이 까무러치기 직전의 애원이 될 때까지 휘젓고 흔들어 놓은 다음엔, 하얀 정을 토해놓고 싶었다.
  흉폭한 맹수의 굶주림에 가까운 위험한 욕망이었다. 그것이 일순간이나마 경염의 머릿속을 지배했었다.   한 톨 씨앗보다도 작은 크기로 시작한 그 충동은 순식간에 덩치를 키웠고, 조금만 더 내버려 두었다간 이성을 밀어낼 만치 부피를 키우고 말았을 것이다. 경염의 몸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더욱더 완벽히 기의 동화를 이루고, 상응하는 쾌감을 얻으리란 것을. 저지르기 전에 매장소를 뿌리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깨닫고 나니 이제는 무섭기까지 했다. 좀 더 완벽한 동화를 갈망하며 제 마음대로 날뛰고 말았을 아슬아슬한 칼끝 같은 경계에 일순간 섰던 것이다. 저도 모르는 사이 선을 넘어버릴지도 모를 자신, 그것에의 자각은 공포에 다름 아니었다.
  “…….”
  경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 흥분과 충동은 곧 진정되었고 점차로 당황도 가라앉았다. 온전히 통제 가능한 저 자신을 되찾았다고 느끼자 모든 것이 빠르게 안정되었다. 그 사이 경염의 머릿속은 오래전 옛 친구와의 일을 떠올렸다.
  처음 심독을 정화했던 열여섯 살의 임수는 심각한 고민이 있었다. 정혼자 예황에게도, 황장자 경우 형님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 고민을, 임수는 경염에게만 풀어놓으며 너는 이런 적이 없었느냐 우물쭈물 물었다. 그 쪽으론 임수보다 늦되었는지 그때껏 심독을 정화해 본 경험이 없었던 경염은, 우직하게도 친우에게 도움이 되고자 기왕 소경우를 찾아가 해답을 물었더랬다.
  ‘그러니까, 경염, 네가 알고 싶은 것이…… 그러니까, 심독을 정화하는 중에 아래쪽 양물이 반응하는 일이 가끔 있느냐, 하는 것이지?’
  ‘예, 형님.’
  ‘네 얘기는 아닐 테고, 누가 대신 물어봐 달라더냐?’
  ‘아닙니다. 그런 부탁은 아무한테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냐.’
  어째선지 몹시 귀여운 것을 보듯 웃던 황장자는 ‘기질(起質)의 기를 일으킬 기(起)로 쓰기도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지.’ 라는 짤막한 답을 주었다. 빗대어진 뜻을 짐작했으니 이를 전해주러 임수를 찾았는데, 그날의 일은 어째서인지 임수의 귀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 임수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경염의 멱살을 잡을 듯이 외쳤었다.
  ‘이 멍청한 물소야! 하필 경우 형님께 그걸 물어 보냐! 나라는 게 티가 다 나잖아!’
  펄쩍펄쩍 뛰던 임수의 목소리와, 쩔쩔매던 자신이 떠올라 그리움에 젖고 만다.
  그 당시의 경염은 심독을 풀어내는 중간에 욕정이 자연스레 일어날 수도 있다고 경우 형님께서 확인해 주셨는데도 임수가 펄펄 뛰었던 심경을 통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화의 중간에 임수가 무엇을 느꼈을지, 그것이 어느 정도나 되는 감각이기에 임수가 제 몸의 반응을 극구 숨기려 했는지, 당시에는 짐작할 바가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제는 경염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황장자의 답을 들은 뒤로 임수는 정화를 한사코 거부하고 버텼다. 그 이유도 역시 경염은 알 것 같았다. 오늘 자신이 느낀 것과 같은 충동을 임수도 느꼈다면, 경악하다 못해 진저리를 치고 말았을 터.
  다행히도 임수는 정화가 절실한 체질이 아니어서 첫 번의 정화 이후로 같은 곤욕을 또 치를 일은 없었다. 열여섯 살의 그 날은 모친인 장공주의 성화에 황실의 ‘기질재자’를 불러들여 심독을 한번 털어내 보았을 뿐, 이후로 정화가 필요했던 적은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것이 벌써 십 년도 훨씬 전의 일이니, 임수가 살아 있다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번의 정화도 없이 버틸 수는 없었을 것인데…….
  아니. 살아 있다면, 이라니.
  무슨 임수가 세상을 떠났음을 전제하는 가정인가.
  임수는 당연히 살아 있다. 경염은 어리석은 저 자신에게 새삼스레 다짐을 주었다.

*

  어쩐지 매장소는 경염이 도중에 벌떡 일어나 정왕부로 돌아가 버린 까닭을 거의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굳이 아는 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의 일을 다시 캐묻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벼운 농지거리로도 언급이 없었다. 그건 경염에게 좀 의외로운 일이었다. 손바닥처럼 훤히 꿰뚫었지만 모르는 척을 해주겠노라고, 의미심장한 웃음과 눈치를 함께 줄 법한 인사가 그러지 않았으니. 대신 매장소는 완벽히 이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경염을 대했다.
  변한 것이 있다면 하나뿐.
  매장소는 경염에게 손을 달라 더는 먼저 요구하지 않았다. 기질이 있다고 고백했던 자체가 애초에 없었던 일인 것처럼 굴었다. ‘심독은 어떻게 해결하고 계십니까?’ 하고 한마디쯤 던져 봄직한데도 모르는 척이었다. 혹은 경염이 먼저 얘기를 꺼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간 둘 사이에서 심독의 이야기를 먼저 화제에 올렸던 쪽은 항상 매장소였기에 그가 입을 다물고 나니 경염은 심독과 그 정화에 대해선 어디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손을 뿌리쳤던 이유부터 시작해야 마땅한데, 급격히 끓어올랐던 흉악한 충동의 어디까지를 설명하고 또 설명하지 말아야 하는가? 난감한 고민으로 머릿속을 어지럽히다 보면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사흘, 나흘, 열흘이 지나니 경염이 먼저 그때의 일을 화제에 올리기도 어색해졌다. 아니, 그대로 잊히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굳이 꺼내어 짚고 넘어가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고, 매장소 역시 굳이 확인받고자 하지 않는데 이대로 흘려보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양자가 입을 다문 채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경염이 저지른 실수가 있다면, 황실의 기질재자를 시켜서라도 자신의 속에 쌓여 가는 심독을 정화하지 않은 것이었다. 매장소에게 느꼈던 충동을 다른 자를 대상으로도 느끼게 될까봐,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스스로를 붙잡아 매지 못하게 될까봐, 경염은 심독의 정화를 차일피일 미루었다. 덕분에 겉보기엔 멀쩡했어도 그의 속에서 독기는 조금씩 쌓여 가는 중이었으니, 그 대가를 결국엔 치르게 될 것임을 조금이라도 짐작했더라면, 경염은 그러지 않았으리라.




3. 심독心毒 에서 계속


(이후 내용은 회지에 실린 것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소으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