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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찰] 일상의 시간 1

블랙팬서 / if 설정 / '화해의 시간'에 이어지는 내용

* 화해의 시간 상, 하에 이어집니다.
상 : https://black-leaves.postype.com/post/1887918
하 : https://black-leaves.postype.com/post/1892964

* 더빙판을 보고 나서 쓴 덕에 화해의 시간과는 용어가 바뀐 것이 있습니다. 예시로 더빙판에서 나왔던 ‘심장풀’이라는 용어가 마음에 들어서, ‘하트허브’ 대신 쓰고 있습니다.

 

<화해의 시간> 간략 줄거리 :

복수의 연쇄를 끊고자 에릭의 도전을 거부한 트찰라. 
하지만 왕족의 권리로 억지 결투를 진행한 에릭.

트찰라의 진심에 흔들린 에릭은 트찰라를 죽이지 못했고, 트찰라는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다며 1년간의 유예를 제안합니다. 에릭이 1년 뒤에도 와칸다의 왕좌를 원한다면 그때에 다시 싸우자는 것. 에릭도 이를 받아들였고 둘의 결투는 누구의 승패도 아닌 상태로 끝납니다.

결투를 그렇게 끝낸 뒤 트찰라는 에릭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같이 하트허브 즙을 마셨고, 주리는 두 사람이 함께 선조의 영역을 다녀올 수 있도록 의식을 주관했습니다. 동시에 깨어난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본 주리는 유예가 끝나는 1년 뒤에도 안심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상의 시간

written by 소으름

 

 

  누구의 승리도 아닌 결투 의식. 1년간의 유예 선언.

  그날의 일을 돌이켜보며 에릭은 생각했다.

  ‘벌써 열흘 전이란 말이지.’

  되짚는 기분은 새삼스러웠다. 그럴 밖에. 마치 꿈속의 것 같았던 선조들의 평원을 다녀온 일도 그새 열흘째란 이야기였으므로.

  지난 열흘간 가끔씩 회상해 보았던 풍경이 다시금 에릭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보랏빛 오로라가 아득한 지평선으로 드리운 대지. 가느다란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과 드문드문 서 있던 나무. 느긋이 뻗은 나무의 가지마다 조용히 앉아 이쪽을 응시하던 흑표범들. 낮게 울리는 그르렁거림만이 사방을 무덤처럼 덮은, 그러나 온화하고 부드러웠던 정적.

  그곳에 들어설 때의 감각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죽음? 혹은, 부활?

  주리가 내민 약물을 마시고 트찰라의 옆에 누웠을 때 에릭은 분명 죽음이라 일컬을 만한 거대한 무엇이 저를 덮쳐옴을 느꼈다. 전신에 더께처럼 뿌려 덮이는 흙의 감각이 희미해지고 쉼 없는 가락으로 선조들을 부르던 목소리도 가물가물 멀어졌을 때, 에릭은 뒤통수부터 녹아내리며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잠겨들었다. 의식의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동안 손발은 수평선만큼이나 멀었고 에릭은 저의 위치를 규정하지 못한 채 그저 어디라고도 부를 수 없는 곳들의 사이를 부유했다. 그때의 에릭은 그야말로 죽음처럼 사위어들고 있었다. 저를 부르는 트찰라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은자다카.’

  그 한마디. 의식에 쐐기처럼 틀어박힌 단 하나의 점. 나지막하고 부드럽지만 단번에 저를 집중시키는 목소리. 그것을 인지한 순간 에릭은 무한히 풀려가고만 있던 자신을 응축해냈고 동시에 트찰라의 옆에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들은 걷고 있었다. 어린 날의 아파트와 농구대가 기웃대듯 그들을 내려다보는 주차장 사이로. 또한 무성한 수풀의 군데군데에 표범의 여신상이 우뚝 고개를 내민 밤공기 사이로. 마치 근방에 산책을 나온 평범한 사촌 형제처럼.

  걸으며 에릭은 이곳이 저의 오클랜드인 동시에 트찰라의 와칸다임을 알았다. 어떻게 두 군데의 장소가 동시간에 겹쳐 있는지 의문은 들지 않았다. 그저 이곳의 가장 마땅하고도 자연스러운 형태가 바로 지금의 것임을 진즉부터 납득하고 있었을 뿐.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청량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스치듯 달려 나가는 어린아이 둘. 경쾌하고도 활발한 달음으로 저만치 앞길을 달려가는 두 소년이 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음박질치는 둘의 모습을 홀린 듯 좇고 있으려니 둘 중 한쪽이 다른 쪽에게 웃으며 던지는 말소리가 들려 왔다.

  ‘바바가 그러는데, 와칸다의 노을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대! 나한테 꼭 보여줄 거라 그랬어!’

  시발, 저건 나잖아.

  깨닫자마자 에릭은 망할 꼬맹이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졌다. 트찰라가 저 짜랑짜랑한 외침에 주의를 기울이기 전에 얼른. 하지만 늦었을 것이었다. 제 안에 꽁꽁 뭉쳐두고 오랫동안 돌아보지 않아 에릭 스스로도 잊어버렸던 기억을 꼬맹이가 벌써 끄집어낸 뒤였으니까. 발칙한 폭로 덕분에 트찰라는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와칸다를 찾아왔던 저의 가장 밑바닥에 무엇이 눌리어 있었는지를.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당혹감과 부끄러움 속에서 에릭은 빠르게 체념했다. 지금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늦었으니까. 이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꼬마가 더 떠들어대기 전에 붙잡는 정도밖에. 따라 달려가서 덜미라도 잡아채야 할까 생각하자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꼬맹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린 에릭 자신이 분명한 그 말썽꾸러기는, 에릭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에릭과 나란히 걸어오는 트찰라만 흘끗거렸다. 마치 트찰라의 눈치를 살피듯 쭈뼛거리는 모양새였다. 자신이 저지른 짓이 뒤늦게 신경쓰이기라도 하는 듯.

  그러게 신나서 떠들기 전에 생각이라는 걸 좀 했어야지.

  속으로 타박했더니 꼬맹이는 부끄럼을 타는 아지랑이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웃음을 주고받던 한쪽이 사라지자 남은 꼬마도 걸음을 멈추고 에릭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에릭은 다른 꼬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나이답지 않게 차분한 얼굴.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는 커다랗고 선량한 눈. 꼭 누구를 닮았는데…… 하고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꼬마는 부드럽게 입매를 올려 미소를 지었고, 꼬맹이 에릭이 그러했듯 흐릿한 추억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뒤늦게 얼굴의 주인을 읽어낸 에릭을 거기에 남겨두고서.

  저건 또 트찰라였나.

  그럼 지금 내 옆에 있는 트찰라는. 에릭이 무심결에 사촌에게로 고개를 돌린 순간, 풍경은 전환했다. 보랏빛 오로라가 머리 위의 모든 하늘을 덮고서 끝없이 뻗어나가는 아득하고 드넓은 평원. 그곳에 에릭은 이미 도달해 있었다.

  ‘저기. 저쪽이야. 은자다카.’

  주변의 풍경에 압도되어 넋을 잃은 그에게 트찰라가 말했다. 어떻게 차분할 수 있는지 모를 목소리로.

  그리고 에릭은, 맞닥뜨렸다. 아니면 들이닥쳤다고 해야 좋을까. 아니, 도무지 어떻게도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에릭은 그저 뜻밖의 시간과 거대한 화해, 거룩한 우연과 선명한 용서가 거기에 있다고만 느꼈다.

  한 호흡의 숨도 제대로 뱉지 못하는 동안에 찰나 같은 억겁이 그를 지나쳐갔고 에릭은 누군가의 발치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고 싶은 마음으로 깨어났다. 부스스 쏟아지는 흙 위에 쓰러져 흐느끼는 대신 그는 “뭐야, 이거?” 버럭 외쳤는데 딱히 답을 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굳이 기원을 꼽자면 추락에의 반발에 가까울 터였다. 차라리 신생아의 울음을 닮은.

  반사적으로 내지른 외침 덕분에 자신을 붙잡을 수 있었던 에릭은, 거칠게 들썩이는 가슴으로 숨을 고르며 방금까지의 경험을 어떻게든 제가 구축해둔 상식의 영토 안으로 끌어들여 해석하려고 애썼다. 허나 무의미한 시도에 성과가 따르지 않음은 어쩔 수 없는 일. 그의 머릿속에서는 환각, 환청, 마약, 약물 같은 단어들만 두서없이 떠다녔더랬다.

  ‘그래도 심장풀을 두고 향정신성 약물이냐고 한 건 좀 바보같았지.’

  에릭은 쓰게 웃었다. 그게 이른바 ‘카타르시스’라 부르는 경험일 수 있겠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친 것은 직후 사흘이 경과한 뒤였고, 그때쯤 에릭은 며칠 묵은 개꿈을 치워버릴 때 대개들 그러듯이 희미해진 체험에 삭막한 메모를 하나 붙여둔 상태였다.

  심장풀의 효능과 주술적 의례의 복합 작용.

  그 결과로서의 유사 임사체험(臨死體驗).

  보통 사람을 초월하는 신체 능력과 감각을 얻는 동안 뇌신경은 과부화에 걸렸을 터. 무수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면서 무의식의 이미지를 마구 풀어놓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한바탕의 꿈인 셈이다. 제가 원하는 풍경을, 혹은 그렇게 유도된 광경을 그려낸.

  트찰라와 머리를 가까이 하고 누운 것도 영향이 있었을 터였다. 그 정도로 선명한 꿈의 이미지를 처리하는 동안 뇌신경은 강렬한 전기 신호―뇌파라고도 하는―를 어지럽게 발산했을 것이고, 날카롭게 갈아붙여지며 불안정 상태에 빠졌을 전신의 감각은 무엇이 누구의 뇌파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휩쓸렸으리라. 마치 주파수의 혼선처럼.

  그러니 열흘 전의 저는 선조의 땅을 다녀온 것이 아니다. 저와 트찰라의 머릿속에 만들어진 환상을 보았을 뿐. 건조한 감상이었다. 동화 속 꿈나라 같은 와칸다의 존재에 설레어 했던 어린날의 자신에게 들이댔다면 대번에 시무룩해질 해석이기도 했다.

  그것이 벌써 열흘.

  에릭은 손을 들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손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며 몸의 한계치를 가늠해보는 그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심장풀의 힘을 취한 몸은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다. 끌어낼 수 있는 힘의 크기가 다르고 반응의 속도가 달랐다. 집중하면 날아오는 총알이나 화살도 포착할 동체 시력을 얻은 것도 물론이다. 이 정도로 향상된 신체 능력을 얻었으니 아마 다시 태어났다고 하는 편이 옳겠지. 그러나 다시 태어나더라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저의 본바탕인 모양이었다.

  비뚜름한 자조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에릭은 쥐었다 폈다 하는 주먹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언제 지울 거지?”

  트찰라가 에릭을 쳐다보았다. 개인 집무실의 책상에 여러 개의 패널을 띄운 채로 보고서를 읽던 그가 눈을 깜빡거리며 에릭을 응시했다.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는걸.”

  “심장풀. 블랙팬서의 힘인지 나발인지. 이걸 언제까지 나한테 허락하실 거냐고 여쭸어, 폐하.”

  대꾸할 때에서야 고개를 들어 트찰라와 시선을 마주하는 에릭은 트찰라의 책상 앞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사실 앉았다기보다는 널브러졌다는 표현이 옳았다. 거의 미끄러질 듯 비딱하게 등받이에 기대어선, 소파의 팔걸이에 무릎까지 걸친 자세는 와칸다의 국왕 앞에서 예를 갖추었다고 하기는커녕 사촌의 앞에 앉아 있다고도 하기 어려울 터였으니.

  한참 전부터 그 방만한 자세였으나 트찰라는 지적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약간의 눈치를 주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신 트찰라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부족의회장에서 오코예가 한 말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나는 옳은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거.”

  낚아채듯 대꾸하며 에릭은 기억 속 오코예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심장풀의 힘이 왕제께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년의 유예 기간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에릭을 빤히 바라보며 지른 말이었다. 정면으로 부닥쳐 온 시비. 그 속에 담긴 경고를 에릭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얌전히 찌그러지는 대신 씨익 사나운 미소를 돌려주었고, 좁혀드는 오코예의 미간을 즐겁게 감상하며 제 고약한 본성을 새삼 자각했다. 이러니 킬몽거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은자다카.”

  “유예 기간 1년 동안 나는 신분이 불분명한 이방인이고, 1년 뒤의 재결투에서 승산이 없을 것 같으면 쿠데타로 왕좌를 차지하는 편이 효율적이지. 암살. 국가전복. 그게 내 특기라는 건 이제 다들 잘 알 테고.”

  트찰라가 입을 다물었다. 에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널브러졌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와칸다라는 이름의 동화는 아름다웠지만, 일상이란 놈이 어디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예쁜 마침표에 꾹 눌러지는 놈이었던가.

  아니지. 오히려 달콤한 단물이 금세 빠지면 납작 들러붙어 딱딱히 굳어가는 껌짝 같은 것이 아니던가. 잠깐 방심했다간 존재의 밑창에 지겹게도 들러붙는. 그러니 꽃잎 풀풀 날리는 소풍도 이제는 끝낼 때였다.

  앉은 상체를 당겨 앞으로 숙이면서, 에릭은 무릎 위로 손깍지를 꼈다. 당장 앞으로 튀어나갈 맹수처럼 자세를 갈무리한 그는 형형한 눈으로 트찰라를 응시했다.

  “좀 진지하게 걱정해 볼 마음이 들어, 사촌?”

  명백한 도전자의 표정이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른다. 범상찮은 기색을 알아챈 트찰라의 시선이 복잡하게 가라앉았다. 에릭은 오코예에게 그랬듯이 트찰라에게도 비뚤게 웃어보였다. 오코예는 사람을 정확히 보았다. 적어도 이 물러터진 사촌보다는 훨씬 더.

  와칸다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겠다던 말 그대로, 트찰라는 지난 열흘간 에릭을 곳곳에 동행하고 다녔다. 심지어 와칸다의 대소사를 논하는 부족의회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덕분에 에릭은 트찰라의 곁에서 많은 것을 조용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간 에릭의 시선과 기색에서 오코예가 무엇을 어디까지 짐작해냈을지는 모르지만, 에릭은 왕궁에 잠입하고 탈출할 때 활용 가능한 루트를 나흘 만에 모두 꿰뚫은 상태였다. 어쨌든 그게 킬몽거의 특기이자 버릇이었으니까. 매순간 본능처럼 자신의 위치를 좌표화하고 그때껏 이동해 온 경로를 갈무리하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침투와 퇴각을 시뮬레이션하는. 경비의 허점을 하나씩 꼽아 리스트를 만들어 가면서.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보다 지독한 습관이었다. 무수한 암살과 공작 활동으로 다져진.

  인간관계의 정보를 틀어쥐려는 습성 역시도 킬몽거의 것이었다. 부족의회장에 입성한 첫날 에릭은 원로들 사이의 미묘한 긴장 관계를 알아차렸다. 사람의 일은 사람 사이에 끼어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라 시간은 걸리겠지만, 한 달이면 차고도 넘칠 터, 굳이 의심스럽게 나서서 묻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한 달만 지켜보면 에릭은 누구를 쿠데타에 써먹을 수 있으며 누구의 입을 어떻게 다물릴 수 있는지를, 또 누구를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지를 손바닥보다도 훤히 꿰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까 본바탕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위험 인자를 그냥 방치한다면 그것 역시 무능한 장군인 것이고. 오코예가 정면으로 시비를 걸어 왔을 때 에릭은 차라리 감탄했다. ‘쓸 만하네.’ 솔직한 감상이었다. 직위만큼 공로를 슬쩍 가로채는 기술만 뛰어난 작자가 아닌, 제대로 일을 하는데 유능하기까지 한 인물이 트찰라의 옆에 있었으니까. 과연 도라 밀라제라 해야 할까.

  그때껏 에릭의 시선을 곧바르게 받아내던 트찰라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책상을 정리하고 걸어와 에릭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은자다카. 나는 네가 그러지 않을 걸 알아.”

  “뭘 믿고. 옆을 꾸역꾸역 따라다니면서 기밀이고 뭐고 다 보고 있는데. 내가 몸을 사린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던가? 이런 건 외부인인 나는 모르는 편이 좋겠다, 하고 뒤로 빠진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느냔 말이지.”

  에릭이 여전히 비뚜름한 미소를 걸고 대꾸하자 트찰라가 착잡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기다란 속눈썹이 그늘처럼 내려깔리는 모습이 에릭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 저 눈. 저 사슴 눈깔.

  에릭은 무심코 숨까지 죽인 채로 트찰라를 쳐다보았다.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눈이었다. 쌍커풀이 선명한 커다란 눈과 기다란 속눈썹. 전사의 폭포에서는 계속 거슬린다고 생각했던 그것을, 요즘은 뚫어져라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릴 때가 종종 있었다. 이상하게도 저건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아니, 보는 재미가 있는 게 눈 하나만은 아니었다.

  에릭을 홀리는 또 다른 것이 있다면, 입술. 타인에게 귀를 기울일 때의, 혹은 자기 말을 늘어놓을 때의. 상대방을 경청하는 중의 트찰라는 반박이든 긍정이든 할 말이 생기면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입술을 작게 달싹거리곤 했다. 도톰하게 올라붙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미세하게 움찔대는 모습은 심장풀의 힘으로 예리해진 시야에는 달려들다시피 박혀들기 마련이었고, 일단 한번 눈을 빼앗기면 에릭은 도무지 거기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법 같은 시간은 트찰라의 경청이 끝나고 말을 할 차례가 되어서, 달싹거리기만 하던 입술이 비로소 모양 좋게 움직여 의견을 풀어낼 때에야 끝났다. 그럴 때마다 에릭은 사뭇 감탄으로 목구멍을 죄었다. 사람 입술이 어떻게 저렇게 생겨먹을 수 있지, 하고.

  그 눈과 입술이 붙은 단정한 얼굴 전체도 마찬가지. 반발에 부딪칠 때조차도 한가지로 정돈된 얼굴에는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끌렸다. 눈썹이 꿈틀, 눈매가 좁혀지나 싶다가도 곧바로 다잡아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얼굴이 되면, 이미 트찰라는 공감과 이해로써 다가서려는 태도를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럴 때 트찰라가 견지하는 진중한 단정함에는 잘 빚어진 예술품 같은 안정감이 있었다. 그것을 더듬듯 지켜보다가 문득 저것도 천성이다 생각이 들 때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에릭의 속에서 녹슨 잡동사니처럼 절그럭거리곤 했다.

  그 트찰라가 눈을 들어 자신을 다시 쳐다보았다. 시선이 똑바로 부딪쳤고 에릭은 일순 움찔하고 말았다.

  “미안하다, 은자다카. 네가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했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상처? 누가.”

  눈살을 찌푸리자 트찰라가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그 아련한 사슴 눈깔에 죄책감마저 담아 쳐다봐오는 것이, 에릭의 대꾸를 비아냥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오코예는 부족 의회에서 발언할 자격이 충분하고, 오늘 그녀의 말은 공무를 수행하는 중에 나온 것이다. 왕으로서 나는 의회의 발언을 보장하고 존중해야 해. 그러니 그 자리에서 오코예더러 너에게 사과하라고는 할 수 없었어. 더구나 그건 형식상 나에게 한 말이었고.”

  “……그런데?”

  되물으며 에릭은 의회의 발언을 ‘보장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왕으로서 트찰라가 그날 오코예에게 했던 대답을 떠올렸다.

  ‘오늘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네, 장군.’

  드물게도 단호히 자르는 목소리였다. 오코예를 당황시킬 정도로. 오코예가 ‘폐하.’ 불렀지만, 트찰라는 고집스레 손을 내저으며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러니까 뭘 믿고?

  이번엔 정말 진지하게 던져보고 싶어지는 질문이 에릭의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대신 회의의 주재자로서 오늘 회의 중에 있었던 일을 너에게 사과하고 싶어. 회의 중에 일어난 일은 내 소관이고 내 책임이니. 그리고 오코예와도 대화해보고 오해가 있다면 바로잡겠다. 이게 너에게 사과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러니까. 저 사슴 눈깔이 이게 모두 내 허물이니 나를 원망하거라 하는 식으로 쳐다보면 좀 정신이 없어졌다. 에릭은 환장할 것 같은 심정을 꾹 눌렀다. 하지만 조금 커지는 목소리까지는 눌러 담지 못했다.

  “지금 누가 사과받고 싶댔어. 사과가 목적이었으면 그 자리에서 내가 직접 받아냈지, 이런 식으로 네 앞에서 꿍얼댔을까.”

  “그……렇지.”

  그 사슴 눈깔이 당혹감으로 바쁘게 깜빡거렸다. 트찰라는 정말로 에릭이 상심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원체 어이가 없었다. 읽던 동화책을 갑자기 빼앗기고 일상에 내쳐진 감각이었던 것은 맞지만, 제가 열 살 꼬맹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그 한 마디에 여린 감수성이 후벼파여서 상처 입은 짐승 꼴로 웅크리게?

  “그렇지만, 은자다카. 나는 네가 갑자기 심장풀의 힘을 지우라기에,”

  “맞아. 지우라고. 약물도 있잖아. 폭포에서 썼던 거.”

  “……정말 그걸 원하니? ……왜?”

  왜. 그 물음엔 말문이 막혔다. 에릭 자신도 결심의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정말은 심장풀의 힘을 지우고 싶은 것인지 아닌지도 헷갈렸다. 아니, 그런데 트찰라는 왜 그런 걸 저한테 묻나. 말만 왕이니 어쩌니 할 뿐이지, 자기가 왕이란 자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독점해도 모자랄 힘을. 생각이 짧아 내어준 걸 상대방이 반납하겠다고 하면 적당히 체면치레하고 냉큼 받아 넣을 일이지, 왜 지우고 싶냐고 묻는 꼴이라니. 선량하다 못해 쓸개라도 빼줄 듯 굴고 있었다. 뱃가죽을 그어대는 단검 같은 선량함이었다.

  그 모든 말을 트찰라의 앞에 내어 놓는 대신에, 에릭은 질문을 되돌렸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쥐어주지 못해 안달이야. 너 대신 내가 블랙팬서로 전장에서 뛰기라도 원하나? 목숨값에 대타가 필요해?”

  “그런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한 적 없어.”

  트찰라는 정색하며 답했다. 물론 그럴 테지. 알면서도 휘저어 주도권을 슬쩍한 에릭은 시침을 뚝 떼고 재차 물었다.

  “그럼 너야말로 왜.”

  “나는……”

  쉽사리 나올 줄 알았던 대답이 한참 걸린다. 의외였다. 트찰라는 자기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트찰라의 고민에 어쩐지 에릭은 덩달아 긴장하고 말았다. 그가 숨까지 죽여가며 답을 기다리는 동안, 한참을 허공을 훑어내듯 눈을 굴리던 트찰라는 결국 한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공정하지 않다. 대등하지 않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느껴.”

  답을 듣는 순간 에릭은 속이 미묘하게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공정함. 그래, 그거 좋지. 트찰라다운 동기이고 이유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올 건 그것밖에 없는데, 자신은 뭘 기대했던 건지. 제가 받고자 했던 것의 형태를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로 에릭은 하, 비웃음 섞인 숨을 뱉었다.

  “혼자만 약물 도핑을 하고 있는 게 공정하지 않다는 뜻? 그겁니까, 폐하?”

  “그래. 그날의 결투는 누구의 승리도 아니었고. 블랙팬서의 힘…… 심장풀의 힘은 결투의 승자에게 주어져야 할 것인데. 너와 나 사이의 결투는 유예된 것이고. 그러니까…… 그걸 너에게서 거두는 건, 내키지 않아.”

  중언부언 거기까지 말한 트찰라는 정리하듯 덧붙였다.

  “너에게서 심장풀의 힘을 지우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해.”

  “과연. 공정함의 문제란 말이지. 그런데 왜, 비브라늄 수트에는 그 공정함을 적용해 볼 생각이 안 들었나 보지?”

  에릭은 좀 빈정거리고 말았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당황한 트찰라가 그건 안 되겠다 물러나는 꼴을 뒤틀린 배알로 봐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환장스러운 건, 이런 개소리에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트찰라다. 미처 그건 생각지 못했다면서.


 

 



                                                          

상중하로 끝나지 싶은데 분량 가늠이 안 되어서 1을 붙입니다.
1,2로 끝나더라도 놀라지 않으셨으면...
보고 싶은 장면은 명백한데 쓰는 속도가 느린 글입니다. 천천히 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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