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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매] 비, 여름과 겨울의 날에

랑야방 - 경염임수 / 정매

비, 여름과 겨울의 날에

 written by 소으름

 

 

그날은 비가 내렸다고 경염은 기억했다.

투둑, 투두둑, 처마의 기와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 그치지 않을 습기로 임수의 열일곱 입술에 맺힌 여름. 천둥벌거숭이들처럼 휘달리며 성 밖 냇가에 천렵을 다녀오던 길이었을 것이다. 웅크린 먹구름이 들이붓는 빗발은 쉬이 가늘어질 줄을 몰랐고, 둘은 어느 담장 처마 아래에 바짝 붙어 서서 소나기를 지나 보냈었다.

젖기야 이미 냇가에서부터 홀싹 젖은 몸이었다만, 푸하하핫, 웃음 터뜨리며 좁은 처마 밑으로 달음박질치는 임수는 마냥 흥에 겨워 있었다. 덩달아 미소를 올린 경염도 놓칠세라 따라 달려서는 임수의 옆에 붙었더랬다. 그곳이 마땅한 저의 자리였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솟아나는 웃음을 그저 물어 당기는.

요란하던 매미의 소리도 한바탕의 장대비에는 속절없이 사그라진 여름날의 오후. 젖은 공기 속에서는 끊임없는 빗소리와 할딱할딱 뒤를 채는 웃음, 그리고 몰아쉬는 숨소리만이 엉겼다. 골목을 꺾어 덜걱대는 우마차 한 대쯤 들어올 법하건만 경염에게 들려오는 소리라곤 그뿐이었다. 혹은 그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이 그뿐이었을지도.

이윽고 웃음조차 잦아들었을 때는, 여름비에 흠뻑 달은 열일곱과 열아홉의 싱그러운 육체가, 맞닿은 어깨서부터 아지랑이처럼 일어 홧홧해지는 열기가, 뜨끈한 날숨이 첩첩이 쌓이면 덩어리진 녹음처럼 무성해만 가는 그것이, 경염을 임수에게로 끌었다. 또한 임수를 경염에게로 끌었으리라.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 입술과 입술 사이로 잘게 흐른 웃음. 뺨을 감싸오는 손. 뒷덜미를 감아 기꺼이 당겨오는 손. 재차 겹쳐지는 입술.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도록 한데 엉기어진 접문(接吻)의 기억.

그날은 그렇게 비가 내렸었다고, 경염은 기억했다.

 

이날도 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겨울의 비. 차라리 눈이라면 나았을. 이제 임수는 그때처럼은 웃지 못한다.

그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13년. 기나긴 세월을 돌아 드디어 그를 만난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경염이 다시 임수의 곁에 섰을 때는, 임수의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황스러웠던 것은, 매장소라는 단단한 외피.

쿨럭 쿨럭, 밭은 기침소리가 울렸다.

경염은 다급히 임수에게로 다가갔다. 어깨부터 전신을 흔드는 기침. 그 기세를 도통 이기지를 못하니 임수는 앉은 채 점차로 허리가 굽어든다. 경염은 그를 두 팔로 조심스레 감싸 안고는 몸을 세워주었다. 그리고 머리를 제 가슴에 기대어 주었다.

품 안에서 벌벌 떨며 뱉어내는 기침. 마치 피가 끓는 듯하다. 오래 뱉어낸 숨의 사이로 급히 마시는 들숨은 울음처럼 거칠었다. 문과 창을 굳게 닫아걸었건만 기어이 스민 냉기가 임수의 목을 죄고 있었다. 발치에 발간 숯을 가득 채운 화로를 두었으나 있으나 마나한 것이 아닐지. 묵묵히 경염은 임수의 등을 쓸었다. 양 팔 가득 그를 품은 제 몸으로 온기나마 전하려 애쓰면서.

이 지경이 되고도 임수는 제가 겪은 고초를 경염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캐물을 것이 아님을 알기에 경염은 언젠가 임수가 그 모든 고통을 드디어 관조할 때를 기다릴 뿐이나, 과연 그때에도 임수가 모든 것을 털어놓을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덮어쓴 외피가 오죽 견고해야 말이지.

겨우 기침을 가라앉힌 임수가 고개를 들어 경염을 바라보았다.

“안아줘, 경염…….”

희미한 속삭임. 달싹이는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경염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임수의 마른 몸을 감싼 팔에 지긋이 힘을 주며 입을 맞추었다. 바싹 말라 차갑게 얼어 있는 입술을 천천히 부비고, 부드러이 열어 젖혀 안으로 파고든다.

제 옷깃을 잡아오는 손길. 그 어느 여름날의 오후처럼. 경염은 임수에게 입을 맞추었다.

투둑, 투두둑, 처마에 부딪치는 빗소리가 끊일 줄을 모르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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