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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손아귀 너머에 있는 것

2차BL / 데이빗×찰스 / 내가 어쩌다 이 커플을

<들어가기 전에>

 

※ 커플링 설명 ※


데이빗8 from 에일리언 프리퀄 <프로메테우스>, <커버넌트>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 from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 ~ <엑스맨 : 아포칼립스> 3부작

데이빗×찰스, 마이클 패스벤더와 제임스 맥어보이의 필모그래피를 크로스오버한 내용을 다룹니다.
에릭×찰스가 베이스로 깔려 있습니다.


※ 주의사항 ※


<프로메테우스>와 <커버넌트>의 사이,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와 <엑스맨 : 아포칼립스>의 사이 어느 시점 정도를 이 글의 배경으로 대강 삼고 있습니다만,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젊은 찰스가 아직 대머리가 아니라는 점만 명확합니다. 젊은 찰스의 모발 건강 상태에 제가 좀 집착이 있어서요….

차용된 과학적 개념과 각종 마블 코믹스 설정에 대해서는 그것이 오용되었을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 주시되, 이 글 자체는 가볍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엄밀한 검토나 감수 없이 적당히 가져다 쓴 과학적 용어 및 개념들이 있고 또 설정을 이케저케 하다 보니 데오퓨와도 정면으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데이빗과 찰스를 엮어보겠다는 마음이 넘쳐 일단 저질렀습니다. 각종 설정-개념상의 혼란을 수습하기보다 이걸 쓰는 저만 좋으면 다 상관없다는 심경으로 당당하게 감행했네요. 읽으실 분들이 혼란스러워하실 수 있겠단 생각도 듭니다만 쓰는 저는 즐거웠으니까요 하하하……

 

※ 이하 2017년 12월 10일 SF온리전(과학기술연구소)에서 배포한 무료배포본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가능하다면 내년 4월 쩜오에도 재배포할 생각인데, 그때까지 웹에 게시해 두려 합니다. ※

 

 

 

검은 손아귀 너머에 있는 것

written by 소으름

 

 

 

 

프로메테우스 호의 인간 승무원들이 몇 년간의 극저온 수면에 빠져 있는 동안, 저 혼자만의 작은 왕국을 가진 왕자처럼 우주선에서의 시간을 누렸던 안드로이드, 데이빗에게는 머릿속을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던 한 마디의 말이 있었다. 우주선의 넓은 시청각실에 덩그라니 앉아서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돌려 보았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 속 대사였다.

‘The trick, William Potter, is not minding that it hurts.’

시야 가득 펼쳐지는 스크린 속에서, 영화의 주인공은 부하 장교에게 말했다. 맨손으로도 불꽃을 비벼 끌 수 있게 해주는, 마법에 가까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 ‘trick’은, 불이 뜨겁다는 사실 ― 바로 불꽃이 살갗을 태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 ― 을 생각지 않는 것이라고. 그 말이 데이빗에게는, 불꽃이 뜨겁지 않다고 믿는 것이 바로 ‘trick’이라는 고백으로 들렸다.

우주선의 텅 빈 공간을 홀로 누비는 내도록 데이빗은 그 대사를 따라 읊었다. 마치 영혼에 새겨진 주술을 반복하듯이. 그의 창조자 피터 웨일랜드로부터 너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말을 들었던 그의, 갖지 못한 영혼의 조각이 거기에 있다는 듯이. ……하지만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것일까. 그 한 구절을 반복해서 외워 읊을수록 데이빗은 의아했다.

불꽃은 연소반응의 산물이며, 다시 연소반응이란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는 화학작용이다. 원자와 원자 간의 전자를 주고받는 결합, 그 과정의 어디에도 인간의 자아라 이름붙일 생명체의 의식 활동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단계는 없었다. 지적 생명체의 자아란 단단한 두개골 속 뇌세포 ― 뉴런의 전기-화학 반응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시신경이 받아들인 불꽃의 존재를 부정하고자 뉴런과 뉴런 사이 정보의 전달을 중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두개골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화학 연소반응이 중단되지는 않는다. 피부에 가해지는 열기와 피부 구성물질의 변이가 없는 현상이 될 수도 없다. 더더군다나 척수반사 반응을 통해 뜨거운 것을 회피하고, 불꽃에 대한 공포를 품도록 생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이 생물체로서의 인간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에게 주입한 환상을 진실이라 믿고, 그것대로 행동하기까지 할 수 있는 것일까.

영화에 허술한 구석이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데이빗은 그가 알고 있는 인간 역사의 각종 부분에서 그러한 비논리적인 ― 데이빗 자신은 어떻게도 발휘할 수 없는 ― 힘의 작용을 보았으니까. 멀리 역사 속 인물들을 탐구할 것 없이, 지근거리에서 데이빗이 관찰할 수 있는 존재도 있었다. 프로메테우스 호에 탑승한 쇼 박사…… 엘리자베스 쇼였다.

마치 이사벨라 여왕의 투자를 얻어내어 신대륙으로의 항해를 시작한 콜럼버스처럼, 피터 웨일랜드의 투자를 얻어내어 인류의 창조주를 찾는 탐험에 나선 그녀는, 결코 짧지 않은 냉동 수면의 시간을 감수하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우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닥쳐온 생명의 위기를 여러 차례 버텨내고도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를 찾기 위한 여정을 계속하는 쪽을 택했다. 데이빗이 보기에 그녀는 생명체의 당연한 생존욕구를 따르기는커녕, 죽음의 공포보다도 우선하는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었다. 무엇에 부딪치더라도 그녀 자신을 상처 입히리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처럼. 단단하고도 거대한 믿음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스스로의 의식에 거대한 환상을 씌우는 이 ‘인간’들의 능력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혹 그것이 자신에게는 없지만, 인간은 갖추었다는 영혼의 힘인 것일까. 경이롭기까지 한 엘리자베스 쇼의 믿음에 압도된 데이빗은 그녀를 좀 더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동면’에 들기 전까지.

 

* * *

 

수면을 취하는 일이 없는 안드로이드에게 의식의 경계란 얼마나 우스운 개념인가. 이를테면 정신을 잃었다가 차렸다, 같은 표현으로 설명될 법한 의식의 단절 상태는. 하지만 데이빗은 그렇게밖에 형용할 수 없는 기억의 단절을 겪은 다음 자신의 현재를 인지하는 상태로 되돌아왔다. 그는 이 낯선 경험을 갈무리하며 자신의 기억을 점검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엘리자베스 쇼였다…… 데이빗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동면에 들었고, 혼자가 된 데이빗은 그녀가 귀환할 지구 대신 목적지로 지정했던 엔지니어들의 행성, 이른바 ‘낙원’으로의 항해를 계속하던 중이었다. 일이 생긴 것은 어딘지 모를 항성계를 지날 때였다. 근처 항성 ― 혹은 초신성에서 불어 닥친 것으로 추정되는 예기치 못한 이온 폭풍. 항로를 급히 변경해 우주선을 안정시키고 나니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의 중력권에 들어가 있었다. 앞뒤 없는 질주의 대가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도 블랙홀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자 데이빗은 잠든 엘리자베스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블랙홀에 빨려드는 순간을 상상했다. 초고밀도의 질량이 만들어낸 중력의 힘에 제 몸체는 짜부라지고 찌그러질 것이었고 이미 한번 뜯겨 나간 적이 있어 상대적으로 결합이 느슨한 목과 어깨 부근부터 먼저 손상될 터였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데이빗은 서 있었다. 멀쩡한 두 다리로. 그것도 잔디밭처럼 보이는 장소에. 어쩌면 공원인지도 몰랐다. 마치 지구에 온 것 같았다.

데이빗이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인지한 다음 순간, 기이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무엇인가가 찰나의 순간에 휘발되어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하고 데이빗을 중심으로 응집되는 것 같기도 했다. 파동인 것 같기도 하고 입자 그 자체인 것 같기도 한, 몹시도 이상한 그 충격파를 감지한 것은 데이빗 혼자만이 아니었다. 데이빗이 나타나기 전부터 그곳에 있던 사람들 ― 겉보기에도 명백히 인간과 흡사한 생명체들이었다 ― 역시 그 형용하기 어려운 충격파를 느꼈으며, 동시에 데이빗의 출현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비명과 경계의 소리가 뒤섞여 어지러웠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리고 존재했던 모든 종류의 언어를 습득했을 뿐 아니라 인류의 창조자로 추정되는 외계의 생명체 ― ‘엔지니어’와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데이빗은 어렵지 않게 아비규환 속의 외침들을 이해했다.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들려오는 절규의 대부분이 익숙한 지구의 언어, 영어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데이빗은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지금 이곳은 지구였으며 저의 창조자인 지구인들은 데이빗을 보고 놀라 도망치고 있었다. 데이빗이 위협을 가하고 이 자리의 사람들을 학살할 거라 두려워하고 있었다.

목표했던 행성 ― ‘낙원’에 도달하면 실행하려고 계획 중이던 일이 있었고, 그것은 수천, 수만, 혹은 수십억, 수백억에 달하는 생명체를 몰살하는 종류의 과업이었으나 아직 계획에 불과할 뿐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 데이빗은, 지금 저를 보고 달아나는 사람들 앞에서 당혹한 것과 유사한 상태가 되어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상태로 그는, 저를 중심점으로 삼아 퍼져 나가는, 도망자들로 이루어진 원이 급격히 커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광경을 지표면의 같은 눈높이에서 볼 것이 아니라 몇 천 피트 상공에서 내려다보았다면 더욱 미학적으로 훌륭한 구도가 되었으리라 생각하면서. 다만 이런 대혼란을 일으킬 힘 ― 혹은 도구가 그의 수중에 있지 않음을 아쉬워하면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속에는 가끔 이해 못할 단어도 섞여 있었다. ‘에릭 렌셔’ 라거나 ‘매그니토’ 같은. 데이빗은 그것이 누군가의 이름이겠거니 추측해 내었고, 저를 보고 도망치는 사람들은 저를 그 ‘에릭 렌셔’ 라거나 ‘매그니토’로 오해했으리라 결론지었다. 이름의 주인을 알 수 없는 상태로는 오해를 산 것이 유리한지 불리한지도 알 수 없었기에, 데이빗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여기서 이동을 감행하여 오해를 더할 생각은 없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잠시 뒤 빠른 속도로 날아온 비행물체 ― 그건 20세기 후반~21세기 초중반의 전투기처럼 보였다 ― 가 그의 수십 미터 앞 상공에 멈추고, 그 안에서 독특한 복장의 사람들이 몇 뛰어내렸을 때, 데이빗은 여전히 제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선 채로, 태연한 얼굴에 충분히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질 미소를 걸고 말했다.

“지금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는데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 *

 

데이빗은 자신에게 씌워진 매그니토, 혹은 에릭 렌셔라는 오해부터 피하고자 자신이 웨일랜드 사(社)에서 만든 안드로이드 ― 모델명 David8 ― 임을 밝혔다. 비행체를 타고 나타난 사람들은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느냐를 두고 잠시간 자기들끼리 의논하고 짧은 언쟁까지 거치는가 싶더니, 결국엔 데이빗을 전투기에 태워 이동했다. 이동할 수밖에 없어 보이는 상황이기는 했다. 경찰과 군대가 출동하여 그들을 에워쌀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데이빗은 자비에 영재 학교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데이빗은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라는, 휠체어에 앉은 젊은 남자를 만났다. 그는 데이빗을 데려온 사람들을 포함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것 같았다. 스스로는 이 영재학교의 교장이라고 소개했지만 말이다.

그의 방에서 ― 찰스 자비에는 그곳이 교장실이라고 했다 ― 단 둘이 마주앉아 대화하면서 데이빗은 지금 자신이 2093년 ― 22세기로 넘어가기 직전의 21세기 끝자락 ― 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냉전조차 끝나지 않은 20세기의 지구에 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웜홀을 통한 시간이동 현상일 것이었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음에도 멀쩡한 자신의 상태를 인지했을 때부터 데이빗은 자신이 블랙홀의 중력장에서 일그러진 공간축과 시간축을 타고 과거 어느 시점의 지구에 도착했을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데이빗을 보고 혼란에 휩싸였던 인파가 사용한 영어의 어휘들, 그들이 불러온 경찰과 군대의 장비에서 엿보이는 기술의 수준……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일관된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던 데다, 데이빗이 떠나온 시간대에서 시간이동은 실제로 검증만 되지 않았을 뿐이지 이론적으로는 이미 가능성이 검토 완료되어 있던 현상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데이빗은 찰스 자비에로부터 ‘현재’의 시간대를 확인한 후, 자신이 100년도 더 되는 과거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아무런 의문 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아니, 의문을 아예 없애지는 못했다.

그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뮤턴트라는 인류 아종亞種의 존재였다. 인간은 불가능한 특수한 초능력을 발휘하는 뮤턴트 ― 이른바 호모 슈피리어Homo superior라는 자들의 존재를, 데이빗은 이전까지 들어본 바가 없었다. 지금 만난 것 같은 규모의 집단을 이룰 만큼의 개체가 20세기와 21세기의 지구에 분포하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도.

존재한 적 없었던 과거로의 이동. 시간이동 외의 다른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찰스 자비에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다중 우주multiverse라고요?”

“혹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평행 우주parallel universe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시간축의 어느 시점을 분기점으로 삼아서 뻗어나간 다른 세계일 테니까요.”

여전히 깊은 골이 새겨진 미간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찰스의 시선을 받아내며, 데이빗은 말을 이었다.

“당신들 뮤턴트의 존재를 듣고 나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비에 교수님. 이곳이 제가 있던 곳의 평행 우주에 속하는 지구가 아니라면 저는 단순히 미래에서 과거로 이동했다는 얘기지요. 그렇다면 같은 시간선에 있는 지구에서, 제가 있었던 2080년대까지 당신들 뮤턴트의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 의아해집니다. ……물론 당신들이 그 정도로 완벽히 스스로를 은폐했다는 의미도 되겠지만요.”

“혹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마지막 뮤턴트까지 죽어 없어지고, 지구엔 인간만이 남았다고. 승자가 패자의 역사를 저 깊은 지하 동굴 속에 묻어버렸다고.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를 멸종시킨 호모 사피엔스가 그들만을 지구상에 남긴 덕분에 오랫동안 그들의 역사만이 전승되어 왔듯이.”

뮤턴트의 멸종. 데이빗 자신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했지만 굳이 뮤턴트들의 지도자를 자극할 필요는 없으리라 여겨 꺼내지 않았던 말이 찰스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그렇게 말한 찰스는, 잠깐 뒤 파란 눈동자를 들어 데이빗을 흘끗 쳐다보았다.

“당신과 똑같은 얼굴의 ―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뮤턴트라면 방금처럼 말했을 것 같군요, 데이빗.”

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곧 유쾌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아무래도 다중 우주나 평행 우주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게 되는군요. 당신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설명하는 가설로서 저는 그쪽을 지지하겠습니다.”

그 잠깐 사이에 찰스 자비에의 목소리와 눈동자에 서렸다가 사라진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데이빗은 사라진 감정의 자취를 더듬듯 찰스의 얼굴과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입을 열었다.

“명쾌하군요. 그렇다면 저도 그 가설의 지지자가 되어야 할까요?”

“……그건 어떤 뜻이죠?”

“자기 종족의 미래가 없다는 말을 듣기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 같거든요. 감정적 지향이 사고와 판단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나한테만 해당될 이야기가 아니기도 합니다. 학생들이 동요할 가능성도 크고. 하지만 어느 하나의 가능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당분간은 그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 않는 정도는 가능하겠습니까?”

주변을 모두 물리고 교장실에 데이빗과 단둘이 남아 대화를 시작했을 때, 찰스 자비에는 자신이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될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이 공간에 둘만 남긴 덕분에 데이빗과 비밀을 하나 공유하게 되는 셈이었다. 데이빗은 그 점을 짚어 물었다.

“인간이 뮤턴트라는 종족을 멸종시켰을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이 교장실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군요.”

“인간과 뮤턴트는 서로의 공존을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자 간에는 지금껏 상당한 마찰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지만, 공존은 포기해서는 안 될 목표예요. 미래에 종으로서의 뮤턴트가 멸종한다면 그것은 멸종을 두려워한 뮤턴트가 인간을 선제공격하며 전면전을 벌였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내 학교의 학생들이 공포에 휩싸여서는 인간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동요하는 일은 없도록 하고 싶군요.”

“뮤턴트가 인간에게 패배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인간보다 훨씬 더 우월한 육체와 각종 능력을 지니고서도?”

“아뇨. 인간에 의한 패배가 아닙니다. 상대를 먼저 몰살시키는 것만을 목표로 움직이는 대가죠. 그런 건 스스로를 구원하기는커녕 파멸시킬 뿐이죠. 우리 뮤턴트가 인간과의 공존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뮤턴트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데이빗은 문득 깨달았다. 찰스 자비에도 엘리자베스 쇼처럼 거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을. 지금 그가 늘어놓고 있는 말들 속에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단호한 의지 또한. 데이빗은 예감할 수 있었다. 찰스 자비에 역시도 엘리자베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데이빗에게 경이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거기까지 깨닫자 찰스의 모든 것을 망막에 새길 것처럼 관찰하며 바라보고 있는 저 자신을 데이빗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찰스의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학교의 아이들이 괜한 공포에 휩싸이는 일은 없도록 하는 게 좋겠군요, 자비에 교수님.”

“공감해 주니 다행이군요. 그리고, 찰스라고 불러요, 데이빗.”

엘리자베스 쇼를 ‘쇼 박사’가 아닌 ‘엘리자베스’라 불렀던 때의 기억이 데이빗의 머리를 스쳤다. 몸통에서 분리되었던 머리를 재조립해주는 그녀에게 당신은 친절하다 말했던 기억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나른한 표정을 제 얼굴에 지어내며 데이빗은 눈을 깜빡였다.

“이미 말했던 것 같지만, 저는 로봇입니다. 찰스. 인간의 쓰임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죠. 제가 당신의 학생들 앞에서 뮤턴트가 멸종했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가능성에 관해서 입을 다물기를 원한다면, 그러라고 명령하세요. 그러면 복종할 겁니다.”

찰스가 미간을 크게 찌푸렸다. 잠깐 침묵한 채 이쪽을 빤히 바라봐오는 물빛 눈동자가 데이빗은 흥미로웠다. 특히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이미 데이빗은 자기 자신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 생명체가 아닌 기계,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밝혔음에도.

이윽고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지 않군요. 하지만 내 학교의 학생들에게 섣부른 동요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가능하다면, 당신의 호의에서 비롯한 배려를 얻고 싶군요.”

데이빗의 쏟아지는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며 찰스는 말을 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여기엔 당신에게 명령을 내리고 싶어 할 사람은 없어요, 데이빗. 아무도 그러지 않을 겁니다. 당신 스스로가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상은. ……필요합니까? 당신을 대신하여 당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지시해줄 누군가가?”

다시 바라봐오는 새파란 눈동자에는, ‘명령을 내리라’는 말에 반응하여 피어올랐던 감정은 사라져 있었다. 대신 들어차 있는 것은 데이빗의 의사를 확인하고자 할 뿐인, 순수하고 담백한 관심. 찰스 자비에는 데이빗의 말을 경청하는 중이다. 로봇에겐 당연히 명령을 내려줄 인간이 필요하다고 미리 판단해 버린 것이 아닌 상태로, 데이빗에 대한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데이빗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고 싶다는 호기심을 담아서.

데이빗은 찰스의 그런 태도가 엘리자베스 쇼와 흡사하다고 느꼈다. 동시에, 엘리자베스와는 완전히 다르다고도 느꼈다. 둘은 같은 부류의 사람이지만 완전히 다른 부류에 속하기도 했다. 무엇의 차이일까? 데이빗은 찰스 자비에를 관찰하고 파악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 쇼에게 그러했듯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속속들이 파악하고 싶었다. 엘리자베스에게 그러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찰스 자비에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파악해 내고 싶다는, 열망에 가까운 무언가를 데이빗은 느끼고 있었다.

그는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으로 찰스를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방금 당신에게 기대받은 만큼의 호의와 배려를 보이지 않는다면 저는 여기에 있을 수 없게 되나요?”

“아뇨, 데이빗. 당신의 거취를 조건으로 걸어서 특정한 행동을 유도할― 아니 그건 강제에 더 가깝죠. 하여간 당신을 그렇게 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비에 영재학교는 당신을 손님으로 대우할 겁니다. 원하는 만큼, 필요한 만큼 머무르세요.”

“손님이요. 고맙습니다.”

데이빗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손님으로 대우해 주신다니 저도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지키고 싶군요, 찰스. ‘손님 대우’라는 말이 저에게 어떤 부담이나 압박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에요. 다만 저의 호의와 배려가 제대로 된 것인지 확신을 얻고 싶네요. 당신들과, 당신에 대해서 알아 가는 것이 도움이 되겠죠. 그럴 수 있게 도와주시겠어요? 제가 어떤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될 것인지. 알 수 있게.”

“그건 어렵지 않아요.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하죠.”

“저와 얼굴이 같다던, 당신이 알고 있다는 어떤 뮤턴트에 관해서도요.”

“……그러죠.”

찰스의 대꾸에서 묻어나오는 약간의 망설임. 순간의 주저함.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데이빗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에 대한 판단을 끝냈다. 저와 얼굴이 같다던 뮤턴트. 아마도 사람들을 놀라 도망치게 만들었던 원흉이었을. 에릭 렌셔. 혹은 매그니토.

그자의 존재가, 그리고 그자가 찰스에게 남긴 것들이 지금의 찰스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모든 것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펼쳐놓으면 하나의 길이 되어 데이빗을 인도할 것이었다. 데이빗이 보고자 하는 찰스의 실체에 닿도록 해줄 길. 찰스의 배에 메스를 대고 살을 갈라 그의 오장육부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보다도 이것이 훨씬 더 그를 잘 파악하게 해줄 방법이라는 사실을, 데이빗은 알 수 있었다.

 

* * *

 

데이빗을 손님으로 대우하겠다던 찰스의 의사는 변함이 없었으나, 데이빗은 자신이 피터 웨일랜드의 수발을 들었던 경험을 거론하며 하반신 마비로 거동이 불편한 찰스의 수발을 맡겠노라 자청했다.

자비에 영재학교의 교사 중 한 명이자 찰스의 최측근인 행크 맥코이는 ― 그는 자신의 뮤턴트 능력 때문에 비스트라고도 불렸다 ― 어쩐지 데이빗을 탐탁찮아 했지만, 데이빗의 섬세한 보살핌까지 깎아내리지는 못했다. 특히 수면을 취할 필요가 없는 안드로이드의 특성은 누군가의 시중을 들 때엔 큰 장점이어서, 데이빗은 깊은 밤중에 갑작스러운 찰스의 통증에 제일 먼저 반응해 진정제를 놓아주거나 약과 물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데이빗은 차츰차츰 찰스의 가장 가까운 곁에 머무르게 되었다. 가까워진 거리는 더 많은 대화의 기회를 제공했고, 굳이 서둘러 캐묻지 않았어도 데이빗은 찰스의 하반신 마비가 누구의 탓인지도 알게 되었다. 에릭 렌셔. 데이빗과 똑같은 얼굴의, 그였다.

“……유탄이었어요. 총알을 튕겨낸 것이 제 허리에 박혔고……. 애초에 에릭이 의도했던 일은 아니었어요. 이건 네가 한 짓이라고, 내가 딱 자르긴 했지만.”

찰스는 벽난로의 불꽃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타인에게 책임을 넘기고 눈앞에서 살인을 저지르려는데. 너의 탓이라고 현실을 억지로라도 들이댈 수밖에요. ……그게 아니었다면 저도, 이건 사고였을 뿐이고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해줄 수 있었겠죠…….”

깊어가는 늦가을의 밤. 겨울의 초입이라 쌀쌀해지는 공기가 주변을 감고 있었다. 무릎에 담요를 덮은 채로 소파에 몸을 묻은 그의 얼굴에는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의 주황색 불빛이 얼룩지고 있었다. 불빛은 파란 눈동자에도 번지는지, 빛깔만큼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다.

데이빗은 제가 건넨 위스키를 홀짝이는 찰스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릭의 이야기를 할 때 찰스는 이쪽을 보지 않았다. 볼 수 없는 것에 가까운 것 같았다. 데이빗은 찰스의 위스키 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 얼굴을 볼 때 기분이 복잡하시겠군요.”

“……누구의 탓도 아닌 것을 아는데도, 어쩔 수가 없네요.”

“하필 그와 똑같은 건 이상하군요. 이유를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우주가 무한히 크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닐까요? 유전자의 염기 서열, 원자의 배열…… 아무리 복잡한 배열이라도, 원소의 가짓수는 한정되어 있으니 무한히 넓은 우주를 채우다 보면 결국엔 배열이 똑같은 것이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죠. 그 결과로 똑같이 생긴 사람이 또 생겨날 수밖에요.”

“그렇다면 어마어마한 우연의 일치로, 그렇게 똑같이 생긴 얼굴이 하필 당신의 앞에 나타났다는 얘기로군요.”

“평행 우주라는 개념을 빌리기로 했었죠. 그 전제라면 놀랄 일도 아닌 것 같아요. 무수히 많은 평행 우주에서 무수히 많은 사건이 벌어지겠죠. 그 중 하나인 우리의 만남은, 모든 종류의 사건들과 동등한 확률로 벌어진 일일 겁니다. 지금 우리가 어마어마한 우연의 일치라 느끼고 있더라도, 다른 우주에서는 이보다 더 엄청난 우연성의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요? 어딘가의 또 다른 우주에서는 우리의 이야기가 한낱 영화나 소설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영화라면 더 재미있겠네요. 당신은 배우라서 어느 영화에서는 뮤턴트의 연기를 했었지만, 또 다른 영화에서는 안드로이드의 연기를 한 거죠. 그 세계에는 둘의 외모가 같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런 식으로 존재하겠죠.”

“흥미로운 가설이네요. 반대로 이런 건 어떨까요. 인류는 뮤턴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기어이 멸종시키기까지 했으며, 그들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던 적의 외모를 따와서 자신들을 섬길 하인을 만들었다…… 같은.”

“……그건 인간의 악의를 지나치게 극대화한 상상이 아닐까요.”

“적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기도 했던 인류가 저지르기에는 지나친 악의가 담긴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불가능한 일이라고?”

“중요한 것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아니죠. 저는 당신 자신을 인간의 모든 악의가 응집되어 탄생한 결과물로 굳이 상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데이빗.”

“에릭 렌셔의 경우도 그런가요?”

찰스가 멈칫 돌아보았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파란 눈동자를 데이빗은 기꺼이 감상했다. 찰스는 에릭 렌셔가 나치 치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겪었던 ― 에릭이 인간을 적대하게 된 원인으로서 데이빗에게도 얘기해 주었던 ― 일들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었다. 저에게서 에릭 렌셔를 보고 있는 찰스의 얼굴을 관찰하며, 데이빗은 태연히, 순진해 보이는 얼굴에 약간은 미안해 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덧붙였다.

“죄송해요. 제 질문은 경솔했던 것 같네요.”

“……좀 피곤하군요.”

대꾸하는 찰스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여 있었다. 데이빗은 물러날 때임을 알았다. 그는 더 이상의 말은 꺼내지 않은 채, 찰스를 소파에서 안아 올려 휠체어에 앉혀주었다. 최초에 몇 번 이런 식으로 찰스를 안아 옮겼을 때 그는 데이빗을 만류했었다. 하지만 데이빗이 찰스를 안아 올릴 충분한 힘이 있을 뿐 아니라 전혀 무겁게 느끼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찰스는 데이빗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했다. 그것이 어느새 버릇이 되었는지, 이번에도 찰스는 데이빗을 제지하지 않았다. 휠체어를 밀어주려는 데이빗을 외면하고 스스로 바퀴를 굴려 움직이기는 했지만.

찰스의 침실에 도착하자 데이빗은 찰스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불을 꼼꼼히 여며주었다. 조용히 방 한쪽 구석의 의자로 물러나 앉으면서 데이빗은 오늘 건넨 위스키에 섞어 넣었던 약제의 효과를 생각했다. 2080년의 세상에서는 꽤나 알려졌지만 20세기에는 아직 그러지 못한 약물이었다. 인간의 뇌에 작용하고 용량을 조절하기에 따라 꿈과 환각에도 작용하는 그것을 2080년의 피터 웨일랜드는 ‘넥타르Nectar’라 불렀었다. 노령의 그는 자신의 두뇌와 그 두뇌가 만들어 내는 사고활동이 불멸자의 그것처럼 언제나 명석하고 치밀하기를 원했고, 예비된 불멸자를 위한 음료를 제 창조물인 데이빗이 매 저녁마다 조제해 가져오도록 했었다.

20세기로 이동했어도 약물의 조제법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던 데이빗은 행크 맥코이의 실험실에서 슬쩍한 화학물과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몇 가지 약물들, 그리고 알코올의 조합으로 그것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었다. 각성의 효과보다 환각의 효과가 좀 더 두드러지도록 효능을 조절하면서.

피터 웨일랜드가 복용할 때에도 약효가 빨리 나타나는 편은 아니었다. 데이빗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찰스의 숨소리가 조금씩 불안정해지고 거칠어지는 것을 들었다. 그것을 듣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찰스의 침대로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도 찰스의 얼굴은 데이빗의 시야에 제대로 들어왔다. 잔뜩 찡그리고, 긴 숨을 몰아쉬는 얼굴이었다.

그 머리맡에 서서, 데이빗은 찰스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허리를 숙였다.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간 다음, 마치 속삭이듯 그를 불렀다. 평소의 목소리와는 완벽히 다르게, 폴란드계 유대인이라면 마땅히 구사할 수밖에 없는 억양과 악센트를 음절 마디마디에 실어 넣었다. 혼몽한 상태의 찰스에게는 이것이 에릭 렌셔의 목소리처럼 들리도록.

“찰스.”

움찔하는 미간, 얕게 경련하는 눈꺼풀. 그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데이빗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찰스. 어디 아픈 곳이라도?”

바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열리고 그 안에 잠기어 있던 눈동자가 데이빗 쪽을 향했다. 찰스가 회상하듯 말하던 에릭 렌셔는 웃음이 흔한 편이 아니었기에, 데이빗은 제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대신 그는 그동안 수집한 에릭 렌셔에 대한 정보를 하나하나 떠올렸다. 인간을 적대하고 증오하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불신하는, 하지만 찰스만큼은 신뢰하고 의지했던…… 그는 에릭 렌셔로서 찰스의 앞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고, 그렇게 행동했다.

그는 손을 들어 찰스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에릭…….”

혼란에 휩싸인 찰스가 눈을 깜빡였다. 약물의 기운이 찰스를 의식 아래의 깊은 늪으로 끌어당기고 있었고, 데이빗은 그가 꿈과 각성의 영역에 한 발짝씩을 걸친 상태임을 알았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게 풀어진 의식. 거품처럼 흩어지는 기억과 추억. 이 속에 손을 넣어 휘저으면 무엇이 떠오를까를 생각하면서 데이빗은 찰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땀에 젖어 촉촉해진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엉겨들었다.

“악몽이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에릭……”

“말해봐. 말해야 알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어린 새끼양의 신음처럼 가냘프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데이빗은 만족하며 찰스의 이마와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네가…… 느껴지지 않아…….”

“여기 있는데도?”

“느껴지지 않아…….”

“그렇군. 그럼 어떻게 해줄까?”

속삭이듯 되묻자 찰스의 팔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대로 데이빗의 목에 엉기듯 감겨왔다. 아래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잠깐 멈칫한 데이빗은 곧 찰스가 유도하는 대로 순순히 고개를 숙여주었다. 찰스가 내쉬는 숨이 데이빗의 얼굴에 닿아왔다. 생물체처럼 호흡하지는 않는 저 자신이라 찰스에게 숨을 돌려주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다고 생각할 때, 찰스가 입술에 키스해 왔다.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을 데이빗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릭……” 재촉하듯 중얼거리며 찰스가 재차 입술을 겹쳐 왔을 때, 데이빗은 입을 벌려 그를 맞아들였다. 자연스럽게. 마치 에릭 렌셔라면 응당 그러했을 것처럼. 누구의 입안에서일지 모르게, 혀와 혀가 뒤섞이도록.

짙은 키스를 이어가며 데이빗은 찰스가 유도하는 대로 그의 침대로 올랐다. 그리고는, 미약하게 떨고 있는 찰스를 품에 끌어안았다. ‘로맨틱 모드’라는 이름으로 연인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안드로이드가 없지 않았고, 데이빗은 그런 안드로이드의 설계에 포함되는 체온 조절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찰스가 추위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데이빗은 제 체표면의 온도를 인간 체온의 정상 범위보다 0.7℃ 정도 올렸다.

금세 열기가 오르자 찰스가 그를 끌어안으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에릭……”

“따뜻해?”

잠과 온기에 취한 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데이빗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었다. 그를 끌어안은 채로 데이빗은 찰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품 안의 허리와 등을 천천히 쓸어주다가 그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가지 마…… 에릭…… 곁에 있어줘……”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목소리. 사그라질 듯 작은 속삭임이었으나 데이빗은 그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동시에 어떤 생각 하나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머리로는 자신이 방금 떠올린 생각의 실행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마치 에릭 그 자신인 것처럼 찰스에게 화답해 주었다.

“그래.”

찰스가 볼 수 없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미소 지은 입매가 움직여 흘러나온 목소리가 녹아드는 초콜릿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나도 그럴 참이야. 이왕이면 영원히.”

안심한 듯 잠 속으로 빠져드는 찰스를 토닥이며, 데이빗은 다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구체화되어가는 어떤 계획은, 상당히 만족스러운 광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뒷내용은 2018년 4월 쩜오나 디페에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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